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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이자현의 영지, 고려정원

by 나무에게 2013. 12. 24.

춘천에서 소양댐을 지나면 청평사를 만난다. 지금까지의 답사는 것이 가보지 않은 곳 위주였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제 몇 바퀴 돌아 본 것이라는 반증이리라. 다시 가 보는 곳은 또 다른 맛을 준다. 아니 처음 와 본 듯한 적도 많다. 이번 청평사 답사도 새로운 느낌 보다는 두근거리는 첫 맛을 준다. 다만 인식으로는 앎의 찌꺼기를 지니고 있다. 시각의 평화로움은 그대로 설레이는 첫 맛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첫 배를 타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은 눈치들이다. 강행해야 하는데.....속으로만 되뇌이고 있다. 답사는 악천후까지 강력하게 추진해야 할 내용물이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악천후의 답사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답사의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장소임에도 자연의 선물은 일상적이지 않아서 낯설고, 그 낯설음은 곧 아름다운 시선으로 되살아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박한 마음이 요구된다.

 

이자현의 고려정원은 한국전통조경학회의 학술 조사로 실증되어 복원된 것이다. 이자현은 고려의 세력가이다. 사촌 이자겸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세를 지녔던가.  29세에 이곳 청평계곡으로 들어와 도가적 은일사상으로 세상을 살았다. 그 시대에는 처사불교라 하여 머리를 깎지 않고도 선승으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 아버지의 보현원을 문수원으로 바꾸어 이곳에서 생활을 한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없지만 명필로 써진 동국대박물관 소장인 문수원중수비 앞면에는 고려 예종과 인종이 차를 하사하였다는 사다賜茶의 내용이 있다. 또 뒷면에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셨다. 묘용이 종횡무진하여 그 즐거움에 걸림이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 예종이 그를 두 번씩이나 불렀어도 사양한다. 예종이 남경(서울) 행차 때 그를 부른 적이 있다. 천성을 기르는 묘법을 묻자 욕심을 줄이고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자현의 고려정원은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계곡에 수로를 만드는 정도로 꾸며졌다. 물길을 만들어 정원 안에 연못을 만드니 오봉산이 비친다. 청평사 들어가는 입구에 구성폭포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오봉산 정상 부근의 식암 언저리까지 약 3Km 구간에 이르기까지 자연 경관을 계곡과 돌을 이용하여 구성하였다.  사람들은 한국전통정원을 말할 때, 고산 윤선도의 부용동 정원, 양산보의 소쇄원 정원, 그리고 이자현의 고려 정원을 말한다. 모두 하나 같이 자연의 형상을 최소로 손질하여 다듬은 정원이다. 시각의 정원이라기 보다 의미의 정원이다. 바위에 글 하나를 새겨도 정원이었던 것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세연정을 비롯한 동천석실 등 부용동 원림에서 태어났고, 소쇄원48영도 정원의 풍광을 빼어나게 표현하였다. 이자현의 고려 정원 역시 의미와 정신의 산물이다.

이자현의 다음 시는 은일사상을 함축한 뛰어난 시이다.

득의(得宜) 鳥樂在於深林, 魚樂在於深水. 不可以魚之愛水, 徙鳥於深淵, 조락재어심림, 어락재어심수. 불가이어지애수, 사조어심연, 不可以鳥之愛林, 徙魚於深藪. 以鳥養鳥, 任之於林藪之娛, 불가이조지애림, 사어어심수, 이조양조, 임지어림수지오, 觀魚知魚, 縱之於江湖之樂, 使一物不失其所, 群情各得其宜. 관어지어, 종지어강호지락, 사이물불실기소, 군정각득기의.

이자현(李資玄, 1061-1125), 《제이표(第二表)》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숲 속에 있고, 물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에 있다. 물고기가 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새까지 깊은 못으로 옮겨서는 안된다. 새가 숲을 사랑함을 가지고 물고기마저 깊은 숲으로 옮겨서도 안된다. 새로써 새를 길러 숲속의 즐거움에 내맡겨두고,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를 알아 강호의 즐거움을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어, 한 물건이라도 있어야 할 곳을 잃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제각기 마땅함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자현의 세계관이다. 벼슬을 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시로 나타낸 것이다. 그의 답변이 이러하니 임금으로서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마땅히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영지影池는 이자현의 고려 정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불영사의 영지, 불국사의 영지, 해인사의 영지 등 많다. 청평계곡의 고려 정원은 일본 서방사의 고산수식 정원보다 200년을 앞선 정원이다. 일본은 보통 경지鏡池라는 말을 사용한다. 같은 동양권이면서도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인다. 중국은 명지明池라는 말을 쓴다. 즐겨 사용하는 한자권 문화의 글들을 보면서 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사람의 품성과 언어가 함께 하는 게 분명하다. 고려 정원인 영지에서는 오봉산의 봉우리가 나타난다. 이자현은 이곳에서 하루를 시작하였을 것이다. 무려 천 여년 전의 일이다. 아직도 영지에는 오봉산이 비춘다. 가야산이 비추는 해인사의 영지,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이 비춘다는 영지, 그래서 유영탑과 무영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부처에게 공양 중인 불영사 산봉우리의 연못에 비춤. 이 모든 게 그렇다. 그렇지만 개심사 입구의 장방형 연못은 경지鏡池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봉산 봉우리를 영지에서 보려면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우리의 시각은 보이는 것만 집중되어 있다. 청평사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이자현이 거닐 던 정원의 시작인 구성폭포를 만난다. 그러나 고려 정원의 시작을 구성폭포 전, 거북바위부터 시작해도 된다. 거북이란 바다와 육지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전해주는 전령사가 아니겠는가. 속세와 도를 추구하는 은자의 정원을 구별짓기에 구암(거북바위)은 충분한 의미소를 지닌다. 그런 시각적 호사를 누리다가 영지에 도달하면 갑자기 막막해진다. 무엇을 보아야 하며 어떤 시각이어야 할지를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실눈을 떠 보기도 하고, 한 바퀴 영지를 돌아보기도 한다. 계곡의 물이 어떻게 입수되었는지를 따져보기도 한다. 연못 주변에 숲이 우겨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속상함을 떨칠 수 없다. 그렇게 한참을 몰입하다 보면 영지에 오봉산 봉우리가 맺힌다. 소나무를 사이에 두고 오봉산 봉우리가 점잖게 자리하고 있다. 은유의 정원이다.

청평사 경내를 둘러 본다. 여전히 오봉산의 봉우리에서 직접적으로 시각이 통일되면서 상서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아주 절묘한 입지이다. 풍수적으로도 기막힌 들어앉음이다. 풍수를 잘 모르지만, 봐서 좋으면 좋은 풍수인 것이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그만큼 풍수적으로 좋은 곳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묘소나 사당이나 유적지라도 후세가 잘 찾지 않는 곳이라면 명당은 아닌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청평사의 입지는 매우 탁월하다. 다만 입구의 일주문처럼, 혹은 당간지주처럼 서 있는 잣나무 2그루가 힘들어 보인다. 오봉산의 기운을 견디기에 너무 힘겹고 고통스럽다. 주변에 잣나무를 비보해 줄 비보식재가 필요하다. 언제까지 저렇게 힘겨운 삶을 우리 눈 앞에 보여주게 할 지 걱정이다.

이미 한 쪽 잣나무의 가지가 말라죽고 있었다. 살아 있는 나무로 당간지주의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마 앞으로 여유가 생기는 대로 입구를 담장을 두르거나 하지 않을까 싶다. 계단 아래에서 오르면서 서서히 사찰과 오봉산이 보이는 시선의 오름은 눈맛을 삼삼하게 해준다.

청평사를 뒤로 하고 오봉산 자락, 이자현선생이 정원으로 삼은 식암까지 오르려 나섰다. 적멸보궁 가기 전에 한참을 머물던 곳이 있다. 암벽을 앞에 두고 물이 흐른다. 그야말로 좋은 기운이 가득한 곳이다. 나는 거리낌 없이 암벽 앞 가부좌할 수 있는 너럭 바위에 앉았다. 백회에 가득 강한 기운을 느낀다. 소주천을 돌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계곡의 물소리와 암벽에서 생성되는 기운이 온 몸을 돈다. 그 기운 하나만으로도 천 년 전 고려의 은일이 무엇인지 와 닿는다. 도가적 은일사상은 문학으로부터 정원문화에 이르기까지 은일적 자연관을 형성한다. 은일 사상은 단순히 현실도피를 말하는 게 아니다.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일상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운을 만나는 일이다. 몸과 마음의 수련이다.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주의자가 되고 만다. 삶이 자연인 것이다. 즐거움은 깊은 숲과 깊은 물 속에 있다. 새는 숲에서 물고기는 물에서 제 자리에서 제 은총을 누려야 함이다.

[한국주택관리신문 2009년 10월호 원고 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