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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다

by 나무에게 2013. 12. 24.

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다 / 온형근



4. 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개심사

한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 개심사라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 한자를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마음을 여는 절, 뭐 그 정도이다.
사실은 <뭐, 그 정도>가 심오하게 다가오는 나이에 내가 걸쳐 있다.
개심사 입구 주차장에도 세심동이라는 푯말이 있다.
마음을 씻는 곳이라는 뜻이다. 역시 <뭐, 그 정도>이다.
그러나 역시 가슴을 저릿하게 하며 다가오는 무게가 있다. 내가 그런 세월에 붙잡혀 있다.
이 또한 미혹이 아닐 수 없으리라.

< 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다>라는 푯말이 작게 서 있었다.
눈여겨 보지 않았다가 만나게 된 푯말이다.
법구경에 있는 말을 <개심사>와 어울린다고 하여 누가 착안하여 서 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푯말 역시 아슬한 경관을 지녔다. 글자가 보일 듯 말 듯 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대웅보전 들어가기 위해 옷매무새, 품새를 다듬으려는 공간, 그 발자국에 놓여 있다.
참으로 안목있는 장치에 있다. 혹은 대웅보전을 비껴나오면서 되돌아 기도를 할 때쯤의
발자국 자리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 되리라.

개심사라는 말을 들은 것은 신문지상에서이다.
벚꽃이 한창이거나 단풍이 한창일 때쯤이면 레저 혹은 여행 코너에
환상적인 사진으로 이곳이 소개된다.
많은 사람들이 강원도를 통한 동해, 남해 등으로 눈길을 돌려 있음직한지
한결같이 기자들은 서해를 기사화한다.
더 쓸 것이 없고, 남이 쓴 것을 또 기사화한다는 것은 한심하기 때문이다.
서해를 줄기차가 사람들은 찾아낸다.
서해는 이제 인적없는 어촌까지 카메라 앵글에 따라 새로운 모양을 갖추게 된다.
개심사는 마음 속에서 이끌리는 사찰이었지만, 사찰 조경을 공부하면서도 결국
찾아가지 못했던 아쉬운 곳이기도 하다.
이번 서해로의 출발은 그런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였다. 아니 늦은 감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서해는
생각이 자라서 만나게 되려는 어떤 숙명같은 것을 지녔다.

개심사에서의 낙조를 보면 아름답다고 하였다.
부지런히 개심사를 향하여 가다 보니 광활하리만큼 큰 초지가 보였다.
누가 말타고 다니면 좋겠다고 하였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바라보이는 풍광이
대단했다. 곳곳에 있는 푯말을 보니 이곳은 한우개량소 같았다.
아무튼 대단히 큰 목장임에는 틀림없다. 계절이 늦가을이었지만, 이곳의 봄은
사람들을 엄청난 풍광으로 감동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찾아간 곳,
개심사 입구다.
아저씨가 마당을 쓸고 정리하고 있는데.....저 아저씨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다.
소박한 시골 아저씨의 성실함이 많은 도회 사람들에게 무섭게 자리하였나 보다.

차에서 내려 개심사 입구 첫 계단부터 다른 사찰과 달랐다.
아주 평범한 돌로 사찰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뭘 보러 왔느냐
너네 동네 사찰이나, 이 동네 사찰이나 다를 게 뭐가 있다고 하는 식의
표식이 있을 뿐이다. 발을 옮겨 오랫동안 다녀오고 싶었던 곳이다라는 가슴에
담은 생각은 무시되고 만다. 아니 부끄러워지고 만다.
돌계단 역시 인위적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관을 조성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인위적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게 조성한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 경관 조성의 경지가 입술 하나 삐죽거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감칠맛이 절로 난다. 도대체 비집고 갈 틈이 없다.

몇 구비 계단을 오르면서 만난 송림은 또한 어떠하였던가?
개심사까지 가서 뭘해, 그냥 이 송림에서 머물며 산책하면 그만인 것을....
그저 중생은 여기까지만 와도 선계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여기 저기서 서서 혹은 걸으면서 혹은 걸터앉아,
그렇게 송림에 허연 신선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나무림도 건강하여 보이지 않았다.
간벌이 제 때 이루어지지 않아 갸날프고, 제대로 군락을 형성하여 있지 않았다.
모든 식물은 제대로 군락을 이룰 때 건강함을 지니건만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더 찾는다면, 이 송림은 지금 상태에서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돌배나무의 열매는 돌배다.
그 돌배를 파는 분이 개심사 목전에 있었다. 돌아나오면서 돌배를 사겠노라고
생각하며 그 길을 지난다. 돌배나무는 설악산 신흥사에 아주 큰 고목으로
서 있다. 그 돌배나무를 생각했던 것보다는 분재소재로 파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연 개심사는 위죽투교보다 더 위태로운 외나무 다리와 직사각형으로 길게
파놓은 연못으로 익숙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외나무 다리 왼쪽으로 더 이상 완숙해질 수 없다는 듯 뻐기고 있는 배롱나무 고목을
만난다. 미끈하다 못해 완전히 벗어던진 여자의 몸매처럼 서 있다.
부끄러운 줄 모르기에 꽃을 피울 때의 그 꽃조차 야단스럽지 않았던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주체하지 못하여 연못으로 꽃을 내 던지게끔 한
이 배롱나무의 정교한 위치는 여자의 화장과 비교할 수 있을까?

개심사 대웅보전을 마주한 곳, 왼쪽, 오른쪽이 좋았다.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수덕사의 말사로 개심사는 오히려 번잡하고 관광지화된
수덕사와 의절한 듯 새로운 경지를 일구고 있는 사찰로 보였다.
나는 자꾸 대웅보전 왼쪽의 심검당에 눈길이 머물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굴곡이 제멋대로라고 해야 할 전각 기둥들이 우스꽝스러웠다.
우스꽝스럽다가는 옆의 기둥과 함께 보면 또 이것은 무의미의 의미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개심사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지닌 것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지닌 게 없기에 이곳 개심사가 돋보이는 것일까?
오른쪽 요사채인 무량수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방에서 국수를 끓여 먹는
스님들을 힐끗 바라보며 지나치니 대웅보전 오른쪽으로 펼쳐진 전각들이
환상적이었다.

대웅보전을 둘러싼 심검당, 무량수각, 안양루, 그리고 좁은 마당,
이것이 개심사의 전부는 아니다.
다시 둘러보아야 한다. 우측 전각들이 앉혀진 모습을 걸어보아야 한다.
마주했다. 돌아앉았다. 비껴앉았다 하는 아주 미미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오히려 이쪽에서 멀리 산자락이 아늑하게 펼쳐지기도 한다.
오래도록 그 마당에서 심호흡을 했다. 멀리 산자락을 바라볼 수 있는 선방
근처에서 부석사의 마당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웅보전 오른쪽을 보고 나오다 또 뭔가 미흡해진다.
다시 안양루쪽으로 향하다 귀퉁이로 빠지면 단풍나무가 좁게 심어진
멋들어진 낙엽 길을 만난다.
세인들이 반할 수 있도록 세부경관으로 식재된 것이다.
인간적 척도에 착 안착이 되도록 식재되었다.
그렇다. 그 끝에 <개심사 해우소>가 있다. 서녘에 물들은 하늘도
물러날 때쯤 이곳 해우소를 간다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늦게 도착하여 햇살이 대웅보전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곳 개심사의 <있음>은 <없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분명히 <있음>이었다.
마음을 열지 못하면 아무 것도 <있음>으로 보일테고
마음을 열어도 모든 것이 <있음>으로 보일 것이다.
다만 개심사를 뒤로 하고 돌아나올 때 모든 것은 <없음>이 되고 만다.
개심사 아래뜰에서 부부가 난전을 펴 놓았고,
거기서 돌배나무를 샀으며, 쑥개떡을 먹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없음>으로 태워지고 말았다.
마음을 열어야 자연 그대로를 어떻게 자연처럼 꾸미는 가를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