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끝은 어지럽고 내 시야는 비어있어

내 발끝은 어지럽고 내 시야는 비어있어 / 온형근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하지 않은 구전의 말이 되고 말았다.
고인이 되신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 한창기님께서 생전에 "나는 해미읍장"이 꿈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때는 신문에 가고싶은 곳으로 한적한 해미읍성의 성벽 사진을
통하여 겨우 해미읍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과연 어떠한 곳이기에 그 깊은 안목을
지닌 한창기님을 사로잡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경관 때문인가, 특별한 인연 때문인가,
아니면 한창기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개인적인 성향일까를 말이다. 그러다가 곧 잊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나는 강원도에 면해 있는 이천, 여주 등에서 거주하였고,
충청도의 본산이랄 수 있는 충남과 연계된 서해쪽에는 숭맥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동해보다 서해는 내게 난해한 지역으로만 생각든다.
그러던 차에 수원에서 거주하면서 오히려 동해쪽에 다가갈 기회보다는 서해쪽에 다가갈 기회가
많아진다.
얼마나 많은 길을 이천 여주에서 익혔건만,
이제 다시 수원 근방의 길을 익히느라 참으로 한심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내버스를 타고 무작정을 길을 나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기동력이라는 것은 늘 한계가 있다.

이번 백제문화권 탐방이라는 거창한 답사 주제에 비하여,
사전 준비는 여전히 미약했다.
다만 해미읍성만은 대천해수욕장을 다녀가다가 들린 적이 있어,
다랑쉬 회원들에게 자신있게 몇 마디 더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미 이곳을 다녀갔겠지만, 이렇게 독특한 답사 목적을 띠고 찾으니
새롭고 낯설어질 것이다.
똑같은 장소를 찾았어도 서로 다른 목적으로 다가가면
그곳은 또 다른 장소가 되고 만다.

나는 꼭 두번째의 해미읍성 방문이었다.
첫번째 방문에서 읍성안의 듬성듬성 감나무 몇 그루와 비어있는 성 안이 괴기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두번째 방문에서도 그 느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았는데 그 느낌은 또 달라지는 것이다.
느낌은 살찌는 것이다. 때로 느낌은 살빠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해미읍성의 두번째 방문은 비어있음에 대한 살찌운 관념이었을 것이다.
가장 높은 정자에서 뒤로 나와 성을 따라 동문으로 향하는 동안에 지천에 널려있는
억새밭이 풍경을 돋우고 있었고, 산아래로 기어오르다시피 식재된 대나무숲의
바람타는 소리가 사람을 긴장시켰다.
성벽 위로 성을 도는 내 긴장은 어지러움 하나였다.
어지러워 성안을 열심히 보게되면 성안은 어지러움이 감싸 놓은 비어있음으로 충만하였다.
내 발끝이 향하는 길은 어지러움을 따라 짐승처럼 후들거렸으나,
내 이성은 끝없이 비어있는 성안으로 생각의 속도처럼 향해갔다.

작은 성벽에서도 흔들렸던 나는
성벽 안이 그다지 넓지 않은 해미읍성의 벌판을 넋없이 쳐다보기도 하였고,
높은 성벽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이었던 한창기선생님의 소원인 해미읍장에 대하여는
풀리지 않았다. 한 개인의 평생의 소원을 내 쉽사리 풀어내겠냐마는 존경하는 분이지만
그 분에 대하여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이 상태에서 그 분의 생각을 알고자 하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왜 내가 그 이유를 밝히고 싶어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같은 시대를 호흡하신 분의 생각을 미루어 밝혀내는 것도 이처럼 벅차고 쉽지 않은데
이미 지난 시대를 호흡하고 돌아가신 선조들의 생각을 미루어 밝혀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답사는 늘 그곳에서 먼저 사셨던 분들의 생활로 돌아가서 바라보아야 한다.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살아 온 방식이 다르고 문화적 배경과 가치의 차이에서 오는
미명이 늘 머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답사의 묘미가 있다.
알지 못하고 돌아올 때는 참으로 아늑하다. 혼란스러워 궁금함이 가득 배어
돌아올 때는 그 길이 아무리 막혀도 지루하지 않다. 자꾸 눈을 감고 꿈을 꾸거나
과거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어찌 아랴. 그 꿈에서 그 시대의 삶을 고스란히 얻어낼 수 있을지.

해미읍성은 내게 확연한 보여짐을 거부하였다.
나 역시 그렇게 확연함을 원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이다.
수원성과는 큰 차이가 나는 곳이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과제가 하나 남았다는 게
좋다. 그것이 한창기 선생님을 통하여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그게 하나도 문제되지 않는다.
시작은 그러하였지만 화살은 떠났고 나는 그 시위에 올라타 있다.
해미읍성을 느끼기에 두 번은 미약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