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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여름날의 어깨를 적시며

by 나무에게 2013. 12. 24.

여름날의 어깨를 적시며 / 온형근



여름날의 어깨를 적시며.1
첫째 날-1.출발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더디 지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출발의 모습을, 출발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마신 전날술의 여운이
몸을 가볍게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설레이는 출발 때문인지 그
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약속은 그만큼 사람을 구
속하는 힘이 있나보다.

막상 고향 근처에 몸을 실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지만, 내
가 또 그곳을 그만큼 알지 못한다. 자꾸 변명처럼 자동차가 없었
던 시절에 그곳에서 자랐고, 따라서 좋은 경관을 잘 알지 못하는
시점에 타향으로 내밀렸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지금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걷고 대중교통에 몸을 실는 것이 다인데 지리를
그만큼 익히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성황림을 보러 갔다. 성황림으로 꺾기 위해 신림에서 좌회전을
하려는데 꺾자마자 차를 세우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일행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쌀조였다. 유럽 쪽에서
들어온 관상용 조였던 것이다. 이곳은 결국 우리의 전통 곡식인
잡곡들의 전시장이었다. 수많은 좋류와 품종이 전시된 이곳을 찾
았던 것은 그래도 전통 음식과 곡식이 많이 사라진 지금, 이런 품
종들을 수배하여 재배하고 전시한다는 바람직한 행위에 대한 기쁨
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나는 과거 내 몸에 이상이 있어 찾았던 쥐눈이콩을
볼 수 있었다. 서목태라고 한자명으로 진열되었는데 그 콩은 다른
콩보다 수확량도 떨어질 것이라 생각되었다. 다른 콩들보다 세력
이 약했다. 나중에 그곳에 근무하는 전농촌지도소 공무원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 좋은 것들은 늘 귀한 법이었다.
참으로 많은 조들이 진열되었다. 키가 크고 색깔이 3가지로 나
타나는 쌀조는 그야말로 관상용이었다. 이곳에서는 원주시내의 관
공서에 목화와 함께 쌀조를 분식하여 진열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
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목화와 함께 한을 도려내었을까를
생각나게 하는 목화꽃은 아름다웠다.

잡곡전시포를 학생들이 많이 견학온다고 하였다. 참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 있구나 하면서 농협이 여신거래만 중시할 것이 아니
라, 진정한 농협으로 자리잡으려면 여전히 이러한 농업 생산과 유
통에 관한 사업에 보다 많은 투자와 연구와 노력을 겸하여야 한다
고, 그래야만 농협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
이 되새겨졌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고 곧바로 천연기념물인 성황림으로 다가갔
다. 비온 후라 성황림 근처를 맴돌고 있는 냇가의 물들은 깨끗하
고 힘이 있었다. 그런 힘있는 수맥을 안고 성황림은 여전히 한 여
름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고색창연한 분위기의 숲을 형성하고 있
다. 성황당을 사이에 두고 전나무와 음나무가 무성한 숲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곳곳에 복자기나무의 잔치라, 이곳은 가을에 꼭 한
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동료에게 말했다. 어떤 이는 겨울에 눈
이 왔을 때 찾아오면 더욱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곳 성황림은 우리나라의 낙엽활엽수림의 극성상을 보여주는
곳이다. 천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활엽수림이다. 활엽수림이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은 과거 땔감으로 많이 잘리고 생활 수단으
로서 나무들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성황림이라는
마을을 지키는 숲으로서 줄곧 존중되어 왔기에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참으로 민간 신앙으로서의 마을 공동체 의식은 사람을 사
람답게 만드는 커다란 주인인 셈이다.

그렇게 제천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영월 쪽으로 신림에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은 과거와 달리 강원도에서 강원도 길
을 통하여 영월과 정선을 갈 수 있게끔 된 길이다. 그전에는 꼭
충북 제천을 통하여 영월과 정선을 다녀갈 수 있었다. 물론 신림
에서 영월 쪽으로 난 길이 서울이나 경기 쪽에서 다녀가기에 지름
길이라 이곳을 이제는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


여름날의 어깨를 적시며.2
첫째 날-2.영월을 바라보는 배일치재에서
의 특별한 경험

성황림을 뒤로 하고 국립공원 치악산의 성남리를 마음 속으로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다시 주천으로 향했다. 주천강을 찾기 위
함과 우리 나라 3대 적멸보궁인 법흥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시
간은 정선까지 도달하여 정선 답사를 주춤하게 하였다. 형님들과
함께 주천강을 찾았던 적이 많았던 곳이다. 특히 올뱅이를 잡아
국을 끓여 먹었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여름이면 그 길가 냇물을
따라 차들이 줄을 서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계곡의 여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이곳이 가깝게 느낄 수 없
었던 곳이었건만, 이제는 너무나 가까운 곳이 되고 말았다.

그 법흥사로 들어가기 위해 영월, 정선가는 길을 늦출 것인가
라는 판단은 시간에 의해 주어졌다. 다시 영월로 곧바로 길을 향
했다. 떠나올 때부터 맑았던 하늘이 오늘은 유난히 더 맑았다. 가
슴 속에는 떠남의 발길을 잡았던 것들이 있었건만, 막상 떠남의
여정에 놓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신림에서 영월로
향하는 길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다. 제천에서 영월길이 어디에
서 만나는지 막상 두리번 거려도 예전에 버스를 타고 다니며 눈에
익혔던 미루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정선 근처에서 반갑게
눈에 들어왔던 미루나무는 몇 그루 있었지만 말이다.

정선 가는 길을 알기 위해 고개 재에 있는 트럭 음료 가게에
차를 멈췄다. 제천 사는 사람이 그곳까지 와서 영업을 하고 있었
다. 반갑게 냉커피를 시키고는 우리의 일정을 이야기 했더니 자세
한 안내를 해준다. 답사내내 그러하였다. 식당을 가든 차에서 사
람을 만나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다음 일정을 상의했다. 해장국
집이든 술집이든, 담배가게든, 식당이든, 차가 머무는 곳이든 가
리지 않았다. 묻는 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었다. 미리 모든 것을
알고 사전에 지식을 가지고 오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으나, 가는
곳곳에서 그러한 일정을 논의하는 것 또한 지방에서의 인간적 소
통임에 어쩌랴.

우리가 쉬면서 최초에 일정을 논의한 곳은 영월을 들어가기 위
해 넘어야 할 배일치재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일찍이 영주 부
석사에서 소백산을 바라볼 때 그런 경관이 있었던가. 연실 감탄을
하였다. 배일치재에서 바라보는 영월쪽의 소백산 줄기는 넘실 넘
실 너무나 아름다운 경관 그 자체였다. 맑은 날, 혹은 비온 다음
날의 이곳 경관은 그야말로 세상을 쏙 빼 놓는다 하여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배일치재를 넘고 영월로 들어가는 길에는 몇가지 마음
에 드는 경관을 계속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차를 세울 수
는 없었다. 일행은 3명이었지만, 운전은 가장 연배가 많은 분이
하고 있기에 개개의 마음을 모두 쏟아내며 요구할 수가 없었고,
가는 길 위에서 또 어찌 다른 길로 새는 게 힘들기도 하였다. 그
러나 그곳 문곡리의 버드나무 숲은 마을을 지키는 꽤 괜찮은 숲으
로 아늑하게 마을을 감싸주고 있었다.

거기서 미탄가는 길에는 온통 회화나무로 가로수를 만들었는데
좁은 길에 아직은 성장한 나무는 아니었지만, 곧 성숙한 나무가
될 회화나무의 가지는 충분히 터널을 만들 수 있겠다. 나중에 이
곳이 명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금 그때쯤이
면 도로가 확충될 것이라는 일상적인 생각에 회화나무 가로수가
어떤 운명에 놓이게 될지 걱정이 된다. 마악 회화나무 가로수를
지나면서 보니 <마차초등학교>가 나타난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할 때 이곳 마차초등학교 학생들이 메리야스 유니폼을 입고 제천
까지 시합에 나왔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 마차초등학교를 생전 처
음 지나치게 된 것이다. 특별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동료
들에게 옛 시절을 몇 마디 나누었다. 조금은 흥분되지 않았나 싶
다.

유난히 붉나무꽃이 활짝 피어있는 산기슭의 양지바른 곳을 쳐
다보며 맑은 하늘과 누리장나무의 큰 꽃들이 시원스럽게 우리를
반기는 그런 찻길이었다. 너무 구름이 좋았다. 좋은 사람에게 이
참으로 반가운 구름길을 이야기 하고 싶은 감흥의 노정이었다.

그러다 만난 곳은 영월 동강이었다. 수하계곡이 있고 문희마을
이 있는 곳으로 차를 돌리니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래프팅을 하러
몰려 있었다. 이곳이 출발의 가장 상류인 셈이다. 수하계곡을 찾
는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래프팅 배를 실은 트럭이 분주히 오가
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젊은 사람들과 마을 주민의 주름살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곳이었다. 깎아지를 듯한 작은 절벽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마치 분재의 자연형을 보이듯 의젓하기만 하였다. 사
진을 찍었는데 모두 슬라이드로 찍어 여기에 소개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찬 물에 손을 담그고 잠시 앉아 그들을 바라
보다 그곳을 빠져나와 정선으로 다시 향했다.

산들은 모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젖어 있는 산을 그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도 특별하였다. 바위산임에도 젖어 있다는 것은 바위
위에 숱한 식물을 붙이고 살 수 있다는 여유이기도 하다. 소나무를 비
롯한 교목들도 생을 유지하고 있었고, 지피류 역시 빼곡하게 자신의
입지를 마련한 채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늘 따뜻한 삶을 사는 산이라
는 생각에 흐믓하였다. 건조하고 메마른 세상에 놓여 있어서인지 이러
한 산을 보면서도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는 모양이었다.


여름날의 어깨를 적시며.3
첫째 날.3-화암동굴의 남근석과 화암 약수의 철분수

어라연계곡과 동강래프팅은 그 시원함과 레져로서의 매
력을 생각하면 무척 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몇
년전 그 래프팅을 하기 위하여 안달을 한 적도 있었다. 미
루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래프팅을 다녀오는 하나의 단풍관
광같은 형태로 바뀌자 그 매력은 급강하 되었다. 지금까지
미루는 일이 아름답다는 것을 체험한 적이 많지 않았는데
이 일만은 미루는 일의 미학을 체득하게 하였다. 게으름의
미학을 배우기에 너무 이른 세상살이일까 싶으면서도 때로
는 이렇게 게으름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래프팅으로 망가지는 자연을 보면서 인간의 게
으름은 때로 자연을 생생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
다.

정선 읍내로 들어가는 수려한 경관을 하나도 늦추지 않
은 채, 시장한 일행은 저녁을 먹으러 눈길을 돌렸다. 마침
정선을 도는 일행의 눈에 적당한 주차공간과 위치가 동시에
떠올랐는지 모른다. 감자옹심콧등치기란 긴 이름의 음식을
시켜 놓고 즐겁게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누었던 것 같다. 특히 나를 위해
한 선배가 막걸리를 일부러 읍내로 나가 사 온 일은 두고두
고 고맙기만 하다. 외지에 나가면 그 막걸리를 마시기가 무
척 힘이 들었던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정선 읍내에서 나와 정선 답사를 시작하였다. 정
선에서 영월로 건너가 1박을 영월에서 하기로 하였기에 그
일정에 맞춰 정선 답사의 순서를 정했다. 차로 답사코스를
도는 그 자체가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산과 물과 사람의 환
상적 어울림의 고장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감자옹심콧등치
기의 뒷여운의 깔끔한 기분을 내처 몰아 화암동굴로 향했
다. 내 개인적으로는 고수동굴을 비롯하여 어렸을 때부터
동굴은 몇 번씩 다녀보아서 그렇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
래도 혼자의 마음만 소중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라 함께 그
동굴을 올랐다. 무척 높은 곳에 입구가 있었다. 예전에 금
광을 캐던 곳이었고, 테마동굴로 자리잡은 곳이다.

화암동굴의 탐사는 매우 훌륭했다. 금광의 역사를 되돌
아 볼 수 있었고, 그 안의 산책은 다른 동굴과 달리 기거나
숙이거나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곳곳에 학습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어 일반인 뿐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더 없이
좋은 배움의 장소였다. 이곳에도 석회석 동굴이 발견되어
금광과 함께 기기묘묘한 형상의 종류석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에 붙여진 이름을 보며 많이 웃었다. 억지로 붙인 이름
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책중에 <홍루몽>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즐겨 보는 이유는 아직까지 경관에 대한 묘
사를 이 책보다 뛰어나게 표현한 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
다. 이 책에도 왕비가 친정에 올 때 만드는 경관과 그 경관
곳곳에 이름을 짓는 광경이 나온다. 참으로 적절한 이름을
지은다는 것은 그만큼 동서양의 고전에 통달하지 않으면 곤
란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나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이
름을 짓는 일이 없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더욱 공
공해진다.

그래도 석회동굴을 나오는 끝무렵에 제대로 지어진 이름
을 볼 수 있었다. <남근석>이었다. 정말 민망할 정도로 똑
같이 생겼다. 처음에 이 남근석이 사람이 일부러 만들었겠
거니 하고 물었으나, 아니란다. 처음에는 남근과 비슷한 것
이었는데, 지나는 사람들이 자꾸 손으로 만지면서 모양에
보완하는 마음으로 만져 실제로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짔
다는 것이다. 이곳은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어... 등등
많은 이들이 만져 닳고 보완되어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만
들어진 거대한 <남근석>을 보면서 화암동굴을 빠져나오게
된다. 그 안에서 본 많은 느낌과 경관들이 동굴을 빠져나오
면서 일시에 남근석 하나로 묶어지는 것이다. 화암동굴은
한참 뒤에 되새김질해야 답사의 여운이 남지, 나오자마자
화암동굴을 되새기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 거대한 남근
석이 모든 기억을 백지화시키기 때문이다.

다음 일정대로 화암약수로 출발하였다. 꽤나 많은 사람
들이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걷는
데 길 가장자리에 소 여물통을 세우고 자생화를 심어두었
다. 그러나 그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꽃들의 키가 서로
다르고, 풀들이 침입하여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입장료를 받으면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곳을 보면 의
아스러웠다. 차라리 식물을 없애든지, 식물을 심어놓고 관
리하지 못할 것이라면 말이다. 철분이 많은 화암약수를 맛
을 보았다. 나는 예전부터 이 물을 마시는 데 자신이 없었
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약수물의 분출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듣고 애처롭게 화암약수터의 수명을 생각
해 보았을 뿐이다. 입구 가게에 잔뜩 늘어놓은 한 말들이
물통을 보면서 그런 비애를 더 느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이 그 약수를 아껴야 하고, 실제로 그 약수터에는 그런 글
이 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조금씩만 뜨자라는 구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 장사꾼들은 제일 앞에 물통을 진열
하고 팔고 있는 것이다. 이 모순덩어리의 세상에 버젓이 살
고 있다. 그럴 때마나 몹시 슬퍼진다.


여름날의 어깨를 적시며.4
첫째 날.4-정선 몰운대에서의 한 잔 술

많은 기대로 찾았다. 휘몰아치는 강의 회전 중심에 몰운
대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위용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가슴을 뛰게 한다. 고사된 소나무 한 그루가 그런
내 마음을 읽듯 체념의 화석으로 남아 있다. 그 아래로 100
여명이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며 함께 할 수 있는 반석이
있다. 참으로 신선이 어울리는 곳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그
런 공간이다. 건너편 반석 또한 짝이 어울린다. 이곳에서
술 한 잔 마시며, 강 저쪽의 사람과 건배를 할 수 있다면
그윽한 마음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오래도록 정감 어린 교
우 관계가 형성되겠다.

한번 몰운대로 오르니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
다. 준비한 막걸리를 꺼내놓고 몰운대에 나있는 넓다는 바
위에 올랐다. 이곳에서 한 잔 술을 마시기 위함이었다. 현
기증과 달리 막걸리 한 잔의 기쁨은 이내 세속의 파란을 절
벽 아래로 내려놓을 수 있게끔 하였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
이다. 아쉬워 못내 아껴 마시면서 이곳에 앉았던 선조들의
풍류를 떠올렸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이곳까지
찾아와 시름을 잊으려 했음일까. 풍류의 넘치는 힘을 나누
었을까? 대체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무척
힘이 든 한 해의 시작이었다. 낯설고 부딪히는 여러 상황들
을 인내하기에 벅찼던 그런 나날이었다. 몰운대는 이런 나
의 한 학기를 씻어준다. 세속이라는 말을 세속으로 여기게
끔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세속이었다. 내가 속으로 앓고
있던 것들이 모두 세속인 셈이다. 벗어나지 못하고 그물에
잡힌 채 아둥대던 것들이 모두 세속이었던 것이다.

나를 그렇게 반긴 것은 몰운대 소나무 고사목이다. 까맣
게 세월을 태워가고 있는 소나무로 하여금 나를 깨닫게 하
였는지 모른다. 저렇게 변해 있는 소나무가 다음 방문에도
그 자리에 있게 될까라고 되물어 볼 정도로 그의 삶은 까마
득히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내 속도 저렇게 까맣게
타고 있음인지, 자꾸 심정적 동류감으로 시선이 흐려졌
다. 어디서나 대의 형태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누와 정은
인간이 자연과 함께 하는 친근한 정서이다. 자연과 함께 하
며 동시에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을 말한다. 현실적으로
는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토론을 하고
그 장소와 의미가 뚜렷한 그런 공간이다. 누와 정과 대의
구별은 다음과 같다.

정(亭)은 높은 곳 위에 세운 집으로 공간이 개방되어 있
고 살림을 위한 집이 아니라 집회를 위해 따로 굽이쳐 흐르
는 냇가나 훌륭한 경관에 지어진 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망범위가 넓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성이 풍부하고 주변
지형에 어울리게끔 지어지면 된다. 보통 낮은 마루로 되어
있는 것이 정자이다. 형태는 사각형, 6각형, 8각형, 부채
형, 십자형, 아자형 등 다양하고 왕궁의 정자는 단청을 하
나 민가의 정자는 단청하지 않고 초석이나 기단에 다듬은
돌을 쓰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정자는 조경 공간에 정적인
기능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동시에 주
변 경관을 바라보는 차경적 요소이며 고정된 방향이 따로
부여되지 않는다. 보통 2층이 아닌 단층의 그리고 사방이
트여 주위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건축물을 정(亭)이라 부
른다.

루(樓)는 설문해자에서 겹쳐있는 집이라 풀이하였다. 고
려말 대문호인 여주사람 이규보에 의하면 집 위에 집이 있
는 구조라 하여 2층으로 된 형태의 건물 즉, 아래에 사람이
있을 수 있거나 혹은 통행할 수 있는 건물의 형태라 하였
다. 따라서 마루가 사람의 키보다 높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내가 근무하던 여주의 영월루가 그러하다. 지금은 관아에서
벗어나 남한강변에 옮겨져 있지만 이규보의 정의와 영월루
는 시대를 함께 하는 역사의 숨결이 함께 묻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 오는 영월루에 올라 막걸리 한 잔을 마시던 그
풍류가 마냥 꿈결이기만 하다. 다시 그 곳을 오를 수 있는
날이 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노는 것을 어쩌
랴. 경회루의 경우 아래는 대이고 2층은 루이다라고 정의하
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대 위에 지어진 집을 루라고 한다.
정자가 개인적인 기능의 바라보기 위한 집이라면 루는 공적
인 기능의 바라보기 위한 집인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堂)은, 작고 정정당당하다는 뜻으로
높이 성토한 후 세워지는 건물을 말한다. 당을 만들 때 전
반을 공터로 한 것을 당이라 하고 후반에 실을 얻는 석을
실(室)이라 하였다. 당은 바르고 태양을 향해 똑바로 보는
집이다.

그리고 각(閣)은 2층 이상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 루와
비슷한 건물이다.백제 왕궁의 임류각이 대표적인 각이다.
중국집 상호를 보면 루와 각을 접미사로 많이 쓰고 있는데,
보통 누각이란 말로 루와 각을 함께 부르고 있다. 누각의
루는 2층으로 된 것이고, 각은 문을 정지시키도록 한 것이
다. 누각은 2층으로 된 건물의 1층에 문이 달린 계단을 통
해서 오르는 높은 건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대(臺)의 의미는 흙과 돌을 높게 쌓아 평평하게 만들어
멀리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한 기능의 축조물을 말한다.
강릉의 경포대는 루건물인데 대로 불리고 있다. 이는 건물
보다는 주위환경을 고려한 명칭으로 보면 된다. 정선의 몰
운대처럼 바라보기 위한 기능의 자연 암반도 대라고 부른
다. 강릉의 허리대, 구노대 등은 해안가에 있으면서 정자나
루와 같은 구조물이 없이 평평한 암반 자체를 대라 부르고
있다. 부여 백마강의 자온대, 조룡대, 천장대, 희녀대 등도
모두 자연암반들이다.

자연 암반 자체에서 천길 낭떠러지기를 내려다 볼 때의
아찔함은 지금도 몰운대의 전체적 이미지로 남게 한다. 주
변의 경관이 너무 좋고, 깎아지른 절벽을 휘몰아 도는 강물
또한 일품이고 해서 구름이 잠시 머물며 쉬었다 가는 곳인
몰운대의 일면식은 세월과 함께 늘 가슴에 묻어 있을 만한
오랜 친구가 될 것이다. 이곳에서 함께 마신 술잔의 여운이
여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아주 아름다운 사
람과 술을 마시면 그 여운이 오랫동안 묻어 나오듯 그런 기
쁨이다. 불유쾌한 술잔의 여운이 내 뼈를 깎았듯이, 신선이
머물던 곳에서의 한 잔 술의 여유는 돌아와 내가 살아가는
일에 활력을 주고 있음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