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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연천과 독수리

by 나무에게 2013. 12. 24.

연천과 독수리 / 온형근



성남환경운동 연합에서 철새 탐사를 간다고 하여, 급하게 신청하였다. 여러 차례 철새 탐사를 시도하였으나 성사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 철새 탐사이지, 부모와 함께 나선 아이들과 함께 시끄러움이 통제되지 않는 출발이었다. 둘째 딸도 가져온 털실로 목도리 짜기에 여념이 없다. 설레임이 사라지고 괜히 따라 나섰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그렇게 강가에 수원, 일산, 성남 등등의 환경 연합에서 실고 온 사람들이 풀어졌다. 새는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도 쑥스럽기만 했다.

사진을 찍고 환경운동연합의 행사에 실려 나온 듯한 불쾌감을 나이로 내리누르고 말았다. 온 김에 볼 것은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여기 저기 여울을 살폈다. 어려서 이때쯤이면 물가의 얼음놀이로 하루를 보냈던 생각을 하면서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 까마귀가 날았다. 까마귀도 철새 탐사를 왔기에 더 자세히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새라는 도감을 뒤져가며 자세한 설명을 숙지하면서 까마귀를 보았다.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처음 DMZ 철새 탐사라는 거창한 제목을 보고 따라 나섰지만, 실망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연천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연천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다 저 세상 사람이 된 후배가 떠올랐다. 그곳에 가고 싶었으나,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늘 심장이 아팠던 그가 심장이 아닌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그가 살던 연천의 야트막한 산들을 바라보면서 슬퍼졌다. 그의 흔적들이 여기 저기에 있을 것만 같았지만 내내 나서지 못했다. 함께 떠나야 하는 버스에 오르고는 차창가를 기대어 막연히 후배를 떠 올렸다. 이곳에 와서야 후배가 생각나는 못된 삶을 꾸짖으면서 잠시 숙연해졌다.

결국 말이 철새 탐사였다. 그러나 독수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멀리 묘지에 묘지석처럼 13마리 정도가 서 있었던 것이다. 아주 멀리서 서성대며 망원경을 이용하여 독수리를 관찰하였다. 겨울 철새인 독수리가 우리 들판을 찾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썩은 시체 등을 먹는다는 데, 겨울 들판에 썩은 시체들이 많지 않을 것인데도 이곳을 찾은 독수리들은 의연하기만 하다. 독수리의 비행처럼 점잖아 보이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사실 새들의 비행은 모두 점잖다. 자세히 관찰을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아마도 새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게 된다면 어떤 새의 날아감에 대하여 더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아직은 독수리의 날아감이 점잖다는 표현만으로 그치고 있지만 앞으로 더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 맛에 새를 보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 싶다. 몸이 1미터에 가까운 독수리가 그렇게 선비처럼 의연해 보일 수가 없었다. 썩은 시체를 먹는 것과 외모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독수리에게 뭔가 깊은 뜻이, 깊은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지만 그 일을 거리낌없이 해내는 것을 보면 그에게 유전적으로 전달된 서글픔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내내 연천과 독수리, 그리고 저 세상 사람이 된 후배가 떠올랐다.
모든 게 떠나도 독수리는 내내 남을 것 같다. 수수한 비행의 순간이 자주 떠오르는 것만 보아도, 독수리를 만난 것은 행운일 수 있다. 논이 가득한 마을 뒷 동산에 안치된 묘지와 주변 숲에서 아마 오늘도 수수한 몸놀림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가끔 인근 양계장이 있다면 배부른 하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독수리의 비행이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