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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속리산 천황봉에서 비로봉, 그리고 문장대

by 나무에게 2013. 12. 24.

 

 

속리산 천황봉에서 비로봉, 그리고 문장대 / 온형근



속리산 16킬로미터는 오랜만인 산행임을 육체가 증명한다. 천황봉까지야 원기 하나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노약자의 몸이다. 비로봉을 지나 문장대 쯤에서 지친다. 음식으로 되살린다. 그때 나는 주춤대며 하산을 서두른다. 문장대에는 맑은 물이 샘솟는 가마솥만한 구덩이가 있다. 그 물은 세 줄기로 흐른다. 한줄기는 동쪽으로 쏟아져 낙동강으로, 서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금강이다. 산꼭대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세 강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백두산이 그렇다.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이 된다. 풍수적으로 속리산은 삼수지원三水之源, 즉 세 강의 근원이라는 큰 영기가 서려 있다.

속리산은 삼교_민족신앙, 선도, 불교_의 성지이다. 그와 같은 영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랑쉬의 답사 순서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 할 수 있는 천황봉을 먼저 잡은 것도 의미가 있다. 물론 코스를 달리하였기 때문에 먹을 것을 보다 세밀하게 준비할 필요를 지녔었다. 나는 식당에서 남은 음식으로 비벼서 비닐 주머니에 넣어 다녔다. 틈틈이 그 비빈 음식을 섭취하였지만, 많이들 허기졌을 것이다. 비빈 음식이란 비빈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몰골을 지녔다. 슬쩍 좀 먹어보라고 권하였지만 응수는 없다. 천황봉 옆 비로봉은 막아 놓았다. 비로자나불에서 따온 비로봉, 그리고 그 왼쪽으로 관음봉이 있다. 속리산은 아홉 개의 봉우리가 뾰족하게 솟아 구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속리산에는 천황봉과 비로봉이 함께 있다. 우리나라 명산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대개 천황봉이나 비로봉이다. 우주의 절대신, 주재자는 하나다. 그러나 속리산만 두 봉우리가 함께 존재한다. 계룡산, 태백산, 월출산 등은 최고봉이 천황봉이다. 오대산, 소백산, 치악산, 팔공산 등의 최고봉은 비로봉이다. 나는 비로봉과 더 인연이 있다. 속리산의 천황봉을 먼저 오른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를 지닌다. 비로봉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치악산이다. 그리고 소백산이다. 제천에서 가깝기도 하고, 학창 시절부터 다녀올 수 있었던 탓도 있다. 소백산은 비로사에서 열흘 가까이 묵으면서 옻나무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때 주지 스님이 중광스님과 동문수학한 분이다. 또 한 분은 옻나무로 성불하고자는 스님이었다. 속리산은 신라시대의 오악 중 중악으로 해마다 천제를 지녔던 곳이다. 삼교의 성지이다. 고유 신앙과 선도를 상징하는 천황봉과 불교의 비로봉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래서 속리산의 정기는 완벽한 군화의 기운이다.

속리산은 순수한 자신으로 돌아가 참된 생각을 할 때 질서가 생기는 곳이다. 가정 화목의 기도가 먹히는 곳이다. 가정 화목은 질서 정연할 때 이루어진다. 속리산의 강력한 군화의 빛과 기운이 마음속에 응어리진 어둠을 몰아내 준다. 화합의 새로운 기운이 충만해진다. 속리산의 맑은 기운이 심신을 밝고 활기차게 한다. 가정 화목은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된다. 속리산은 말 그대로 속세를 떠난 산이다. 내려오면서 들린 법주사의 저녁 예불 광경이 눈에 선하다. 속리산에서의 기도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가 가장 좋다고들 한다. 강렬한 태양빛이 쏟아지는 시간이다. 산꼭대기에서 서 있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인다.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먼 산야를 바라본다. 자신을 추스른다. 뜨겁지만 양손을 지속적으로 건드리는 왕조릿대와의 감촉이 아직 남는다. 풀어 기르던 검정 염소와 조릿대길에서 조우한 것은 묘했다. 나와 함께 했던 박장철씨는 놀랐다. 그러다 풀어 기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되돌아서 가던 그 염소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저들이 개발해 둔 서식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국립공원 답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혀간다. 한라산에서는 산만한 감이 있었다. 세 번째 답사에서는 조리 있는 답사가 열릴 것이다. 해마다 주제를 가지고 하는 답사다. 이제는 답사 전에 미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답사 행위 자체에서 답사 주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된다. 속리산 국립공원 답사를 하면서 하나의 패턴을 정리할 수 있다. 국립공원 주변 답사를 통하여 조경문화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국립공원의 정기에 흠뻑 취하는 것이다. 산행은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다. 흠뻑 젖는 것이다. 어느 곳까지 오른 후에 내려온다는 생각을 버리면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염원하는 한 가지 생각을 지닌다. 그럴 때 국립공원은 생생한 기도터가 된다. 다만 그 기도가 직접화법이 아니면 된다. 외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면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입을 맞추고 절을 할 수 있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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