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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호방영민(豪放英敏)과 나룻배와 행인

by 나무에게 2013. 12. 24.

호방영민(豪放英敏)과 나룻배와 행인 / 온형근



홍성의 갈산리에는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다.
답사를 다니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나라의 생가 조경은 문제가 많다.
이러한 생가 조경은 그 지방 관청에서 관광 수입 등의 고려로
그 지역 조경 회사에 경관을 부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방의 조경 수준이 생가 조경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어쩌면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하고 있다.
아니면 전국 규모의 생가 조경만을 전문으로 하는 조경 회사 또는 전문가가 있어
그 일을 치열하게 개척하고 기본계획을 전국적으로 특색에 맞게 만들어
실시설계 등에서 다양한 어떤 네트워크화된 미적 수준을 만들어 실시하여야 한다.
국가가 문화유적지 관리에 투여하는 예산이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하지만 지방 행정 기관에서 관광 수입 등을 목표로 생가를 복원한다면
이러한 생가 조경을 목표로 전문가가 창출되어야 한다.

김좌진 장군 생가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려할 때쯤이다.
차에서 꽤나 졸았다.
내려보니 이천의 도자기 전시장 같은 곳에 정차되어 있다.
생가 건물 오른편으로 김좌진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유물전시관에서 풍겨주는
분위기이다. 첫번째로 다가오는 분위기가 생가가 아니다. 유물전시관이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아무튼 꽤나 웅장한 느낌으로 들어간다.
기념관 쪽으로는 의식적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석연찮음은 무시해 줌으로써 나를 견지할 수 있다.
생가 쪽으로는 걸으면서 눈길에 마굿간에 매어 둔 말이 들어온다.
물론 인조말이다. 그러나 그 눈과 마주치니 살아 있는 듯 하다.
그 위에 김좌진 장군이 올라 타 있는 듯 하다.
말에서 보낸 시간들이 김좌진 장군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을게다.

호방영민하다는 김좌진 장군을 키워 낸 것은 무엇일까를 화두로 삼았다.
생가 경관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다.
식재된 수목들의 관리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기야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니 관리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입장료를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이거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입장료를 받지 않은 곳에서 감동을 못받는 것은 아니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곳이라고 하여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김좌진 장군의 마루에 앉아 잠시 김좌진 장군의 생각을 받으려 했다.

마루에서 멀리 산이 병풍으로 이어지고 그 앞에 너른 들과 내가 흐른다.
장군은 저 들판과 산과 내에서 호방영민한 자신을 마음껏 실험했으리라.
장군을 따르는 친구들에는 계급이 없었겠지만, 놀면서 지위가 있어
그 놀이는 늘 하나씩 새로운 질서와 규율로 매일이 새로웠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때우며 사는 현대의 직장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일신우일신으로 해가질 때까지 성실하게 놀았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 갈 때 태어나 나라의 운명을 몸으로 느꼈을지 모른다.
그는 16세의 나이에 재산 중에 가장 큰 재산이 노예를 몸소 해방시킨다.
노예문서를 태우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태운 셈이다.

장군의 생가 뒷마당으로 돌았다.
뒷동산으로 이어진 산자락이 제법 급경사를 졌다.
산이 이어짐에 경사가 급할 수록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은 기가 세어야 한다.
오대산 월정사 뒷 편도 급한 경사에 대웅전이 놓여 있다. 그래서 이런 곳에는
민가가 들어서지 못하고 사찰이 들어선다고 한다.
장군의 뒷마당은 거니는 사람에게 사색을 주는
뒷동산과 마당이 적당히 위요되어 있다.
위요 경관을 지나면서 장군이 이 뒷동산에서 노예 해방과
민족의 운명,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차분하게 익혀나갔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장군에게 청산리 전투 와중에서도 늘 머리에 꿈결처럼
따라 다녔을 것은 뒷동산이었으리라.

유물전시관도 마주보고 그 길을 돌려 다시 한용운 생가로 발길을 향했다.
한용운 생가는 김좌진 생가보다 면적면에서 압도적이다.
김좌진 생가가 주택정원 수준이면, 한용운 생가는 공원의 수준으로
개방적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입구에 멋진 돌로 각인 되어 있는 시비가 있었다.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내가 다니는 답사는 나룻배였는지 행인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승은 또한 나를 나룻배로 여길지 행인으로
여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용운 생가에는 심우장이란 글씨 현판이 있다.
제법 근래에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이다. 심우장은 본래 서울 성북구에
만해 선생이 1933년대에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다고 북향으로 지은
집이다. 이를 이곳에도 심우장이라 이름하였다.
심우(尋牛)란 찾을 심자 소우자로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되찾자라는 뜻이 된다.

분명히 만해선생에게는
잃은 것이,
잊혀진 것이,
그리고 상실의 전제가 되는 것이 있다는 각성이다.
만해의 출발은 늘 심우장의 현판을 보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여정에 놓여 있다.
한참을 심우장의 현판을 의미있게 들여본다. 꽤 많은 사람들이
또한 꽤 많은 곳에서 특히 사찰 등에서 심우장이라는 현판을 보았다.
심우라는 말 자체가 많이 유통되는 말이 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잃고 산다고 규정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내 답사 여행 또한 이런 인식의 출발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해 생가 복원지 마당을 보면서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학에 수많은 조경과가 있어도 이렇게 손이 미치지 않는다.
결국 예산을 많이 책정하여 큰 돈을 들여야 괜찮은 조경이, 경관이
만들어진다는 진리만 확인하게 되는 것일까. 일정한 예산으로 몇 년에
걸쳐 제대로 된 조경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조경가는 없는가. 그런 회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왜 한꺼번에 예산을 따내고
짧은 시간에 공기를 맞추어 납품하는 일만 횡행하는 것인가.
도대체 돌이킬 수 없는 악순환의 모퉁이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떤 큰 화두를 붙잡고 매진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한다.
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과 정자가 갑자기 그 자리에 왜 있어야 하는지
되묻고 싶었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만든 사람에게 설명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치 식당에서 기본으로 나오는 몇 가지 밑반찬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