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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흰 줄기, 추사 고택의 산책

by 나무에게 2013. 12. 24.

흰 줄기, 추사 고택의 산책 / 온형근




산책을 좋아한다.
추사고택은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예전에 예산에 올 기회란 참으로 드물었다.
예산농업전문대학이 있었다. 지금은 공주대학교이다. 이곳에 대학 써클 선배가 계셨다.
행사 섭외로 이곳을 올 때만 해도 버스를 참으로 여러번 갈아 탔다.
갈아 타야 하는 시절이기도 하였지만,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버스의 배기 가스를
견디질 못하여, 1시간 가량씩 끊어서 버스를 갈아타고 쉬면서 찾았던 것이다.
지금은 후배도 이곳에 있다. 내게는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연락 없이 이렇게들
살아가는 것이 마치 올바른 일인양 각자의 추억을 묻은 채 자기 일을 하고 있다.

추사고택에 도착하자마다 추사고택은 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문을 닫는 모양을 눈 뜨고 그대로 보았다.
늘 답사는 이렇게 철저한 시간과의 견줌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쉽거나 애타거나 하지 않는다. 겉만 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추사고택 안을 서성일 수 있는 날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이든 만날 수 없는 일들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 만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추사고택은 과연 듣던대로 명당의 터이다.
고택 뒤로 김좌진 생가에서 본 것과 달리 야트막하게 펼쳐진 뒷동산이
따뜻했다. 얕게 깔린 햇살을 받으며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택을 뒤로 하고 앞을 내다보면 예당평야가 펼쳐진다.
분명 예산과 당진을 합친 말일지다. 이곳 명당이라 함은 멀리 안산이 보여야 하는데,
어두어지는 구름을 멀리 바라보면서 안산의 위치를 더듬어 보았다.
다만,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빠져나가는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명당터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가슴을 크게 하기에 마땅한 터이다.
어려서 가슴이 컸기에 남들보다 더 험하게 세상을 살았는지 모른다.
가슴에 품은 뜻을 숨기기보다, 정말 어려서는 어리게 조금 나이가 들면 그 나이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평범하면서도 속쓰리지 않은 생활일지 모른다.

산책을 하면서 생각난 듯이 추사 고택을 힐끔거린다.
고택의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무덤이 마련되어 있다.
왼쪽은 추사의 무덤이고 오른쪽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묘가 있다. 화순옹주는
추사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이 고택을 중심으로 멀리 예당평야를 바라보며 펼쳐진다.
살고 있는 사람은 삶을 통하여 죽음을 반추하고
죽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흐믓해 할 것이다.

제법 추사고택은 꾸며져 있다.
곳곳의 산책에 흠뻑 자기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정도의 공간 구성이다.
지방국도로 차가 심하게 달리기에 오른쪽 귀는 시끄럽지만,
왼쪽 귀는 고요하다. 야트막한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지방국도에서 차량이
일어내는 바람이 만난다.
고요와 번잡이 스친다.
걷고 있는 내게도 고요와 번잡이 함께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추사의 삶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추사의 세한도가 떠오를 뿐이다. 동아일보를 인용해본다.

< 출처 : 1997/12/16일 동아일보 기사임.
낯익은 그림,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겨울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곧 무너져버릴 듯한 허름한 집 한 채, 좌우로 잣나무와 소나무 네그루가 서있고 나머지는 온통 여백뿐. 싱겁고 엉성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작품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세한도는 1844년 58세의 추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문인화.
자신을 잊지 않고 먼 곳에서 책을 보내주는 제자 역관(譯官) 이상적(1804∼1865)의 정성에 감격, 그에게 그려보낸 것이다.
그림에 담긴 추사의 꼿꼿하고 엄숙한 정신이야 자주 거론됐지만 구도나 기법 등 형식에 관한 분석은 별로 없다. 하지만 세한도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탁월함을 자랑하는 명작이다.
오주석 한신대강사(한국회화사)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세한도는 두 그루씩 서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기준으로 세개의 여백으로 나뉜다. 맨 오른쪽 첫번째 여백이 제일 넓고 가운데에서 좀 줄어들어 마지막에 가장 좁아진다. 첫번째 여백은 너무 넓다보니 휑한 느낌을 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그림 오른쪽 윗부분에 추사체로 「세한도」란 제목을 써넣어 휑함을 없앴고 그 옆에 세로로 낙관을 배치, 공간을 둘로 나누는 절묘함을 보였다.
세한도는 엉성해보이지만 실은 완벽한 삼각형구도다. 그림 오른쪽 아래구석과 집옆 늙은 소나무 가지를 선으로 잇고 그곳에서 그림 왼쪽 아래구석으로 선을 그리면 바로 삼각형. 오씨는 『불세출의 서예가다운 놀라운 구성력에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보고 또 보아도 세한도가 좋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한다.
추사의 기개를 표현한 그림내용 역시 놀랍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텅 빈 느낌이다. 이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 홀로 버려진 늙은 추사의 심정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역경을 견뎌내는 굳은 의지가 들어있어 한층 진가를 높여준다.
허름한 집이지만 붓의 선은 침착 단정하여 초라함 연민 따위가 들어설 틈이 없다. 그림엔 또 유배당한 옛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와 그 제자를 격려하는 스승의 따스한 마음이 어려 있다.
오씨는 『그림 오른쪽 소나무 두 그루 중 왼쪽의 곧고 젊은 나무가 없었더라면 추사의 집은 무너져 버렸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윤곽만 겨우 있는 추사의 집을 받쳐주는 튼튼한 나무, 그게 바로 추사의 제자다.
집 왼쪽의 싱싱한 잣나무 두 그루도 마찬가지. 수직상승하는 싱싱한 나무는 고독을 이겨내는 의지이자 제자를 통해 이 땅의 내일을 밝히려는 추사의 간절한 희망이다.
당대 최고의 걸작 세한도. 견고한 그림이지만 아래 한구석엔 추사의 애틋함이 숨겨진 네 글자의 붉은 도장이 찍혀있어 보는 이를 가슴 저미게 한다. 바로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자)」>

인용이 길었다. 자꾸 읽어도 좋은 글이기에 실는다.
때로는 이렇게 기자의 글처럼 간략하면서도 뜻을 심어놓은 글이 돋보인다.
자칫하면 장광설이 되고 자칫하면 건조한 논설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국보 180호, 천연기념물 106호
비슷한 숫자를 외워본다.
하나는 추사의 세한도이고 하나는 추사고택 옆의 백송이다.
추사고택에서 더 올라가면 백송이 하나 있다. 유명한 추사고택의 백송이다.
추가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씨앗을 가져와
고조부 묘소앞에 심었다 한다.
나무 씨앗으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많은 선행을 하지만 새로운 생명은 탄생시키는 선행이야 말로 으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아온 과정도 비유된다.
숱하게 많은 수목의 종자를 번식시켜 그 나무들이 곳곳에 생명을 이루고 있다는
벅찬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때로는 10만여개의 종자를 뿌려 7만여주의 묘목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 나무를 전국 사찰이나 원하는 분들에게 무료를 부쳐주기도 했다.
그때 내 생각은 단순했다.
내가 혼자 다 기를 수 없고, 사람들이 나무를 사서 기를만한 여유가
없을진대, 이렇게 나눌 수 있다면 쉽게 생명이 퍼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사비를 들여 그렇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꽤나 치열하게 살았던 한 시절이다.
지금은 3년동안 경작하던 농장도 떠났고, 도시에서 이렇게 머물고 있지만,
나이 들면 돌아갈 터를 또 다시 물색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요즘 내 생활은
추사 고택 정도의 운치있는 명당터까지는 못되더라도
내가 머물 수 있는 고요한 집터를 찾는 나날들이라고 못박아 본다.
그러나 예전보다 열정이 다르고 보는 눈이 다르다.
서두르는 품새도 예전과 분명 다르다.
보다 여유있게,
오랫동안 살펴 볼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오래된 추사고택의 백송도 굵은 줄기는 잘리고
한 줄기가 남아 홀쭉하게 20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끔
안타깝게 서 있다.
그러나 벗겨진 흰 줄기만큼은 세월을 속이지 못하게 한다.
백송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이야기꺼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나무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나무처럼 사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