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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숲길의 순응

by 나무에게 2013. 12. 24.

 

 

숲길의 순응 

사방이 젖어 있다. 그 안에 내가 점으로 박혀 있다. 몸이 긴장된다. 숲길은 모습을 드러낸다. 숲길은 살아 꿈틀대며 내게로 다가와 부실한 내 몸을 휘감아 돈다. 아 그랬었다. 깎아지를 듯한 벼랑에 서 있을 때, 그 아래 깊은 바다가, 그 아래 깊은 바다에서 철썩거리는 높은 파도가, 그 높은 파도에서 퉁겨 나오는 물보라가 숲길은 파도의 물보라처럼 내 몸을 적시고 있다. 아찔한 순간이다.

어딘가 낯선 길을 걷는다. 밤새 건조했던 내 몸은 숲길 자욱한 낙엽의 길에서 다시 생동한다. 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정체 모를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숲길을 가르고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젖어 있는 숲길이 내 삶을 닮아 있다. 오늘은 숲길과 생각이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이 편안한 느낌, 숲길에서 내 몸이 작아지고 가라앉는다.

언덕으로 사람이 있고 숲길이 있다. 언덕을 오르면서 숲 사이로 거닐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떨림이고 웅장한 울림이다. 나무 둥치 위로 가득 휘감고 맴도는 숲길은 신비스럽다. 고요하여 발걸음을 뗄 때마다 드러나는 나무의 둥치가 생경해 보인다. 감췄다 드러냈다 하면서 내가 숲길이 되어 흐르고 있다. 조금씩 보인다는 것, 숲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이와 같아, 명료하여 더 멀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숲길은 흩어진다. 길이 좁아진다. 멀리 떨어져 있던 나무들의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내 몸이 죄어지는 느낌이다. 나도 곧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좁혀진 길을 가로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처에 커져 있는 삶의 연륜이 숲길을 확산시킨다. 나무들을 감싸면서, 숲으로 돌아가기 위한 정물이 된다. 낯설지 않다. 연륜은 숲길을 만나 산 능선을 따라 오르고 있다. 아직 숲에서 이방인이기만 한 나와 마주친다. 숲길과 객석이 하나된 물결이 되어 도도한 흐름으로 어우러진다.

숲길을 바라보기가 민망하다. 숲길의 나무들은 까만 붓으로 휘갈긴 채 굽혀지고, 휘어지고, 수직으로 굵게, 가늘게 서 있다. 숲길은 순응을 그려낸다. 숲길이 그려내는 순응은 고적하다. 숲길에서 순응은 모든 것을 감싸준다. 숲길이 감싸고 있는 모든 순응은 연륜이 된다. 저 쓸쓸하고 우울한 잿빛 순응의 드러냄, 그리고 그 속의 짙은 연륜이 아무 말 없이 숲길이 되어 있다. 그렇게 서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숲길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