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쑥뜸’일까? 소지 공양(燒指 供養)일까?

by 나무에게 2013. 12. 24.

'쑥뜸'일까? 소지 공양(燒指 供養)일까? / 온형근



자신의 삶 모두를 바쳐 가족에 헌신한 어머니
어머니의 뜸은 뜸이 아니라 소지공양입니다

올 여름을 보내면서 뜻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몇 가지 여물어 간다. 하나는 배움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기후 변화에 관한 것이다. 생각들이라는 게 계절과 세월을 통하여 변화하고, 변화는 외물(外物)에 마주하는 사고 체계를 건드린다. 내게는 그 건드림이 단순한 귀결로 이어지도록 유도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모든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지독한 반성적 성찰에서 출발의 주춧돌을 세우고 과정의 진행이 아름다워야 한다. 모든 출발과 귀결이 외물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계절과 세월을 바꾸어가면서 저절로 뼈마디에 새겨지게 된다.

배움보다는 깨달음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배움은 배움을 실천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의아해 한다. 배움이 나를 조종하며 나를 지배할 수 있다. 사실은 배움보다는 깨달음이 더 필요하다. 깨달음 없이 ‘남에게 배운 것’에 들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화제에 빈곤한 사람이 ‘남’에게 ‘남’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급급한 것과 같다. 자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하고, 전달받은 사람은 또한 ‘남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화답하곤 한다. 이럴 경우의 배움이란 자기 자신을 빼앗기는데 크게 기여한다. 나는 없고 배움만 있다. 깨달음 말고 나머지는 모두 외연이다. 껍질이라는 이야기다. 부족한 것은 외연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그 본질은 삶의 깨달음이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내재하고 있는 도에 관계된 것이다. 더 이상의 풍요로움에 길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을 수 있으면 그것은 어머니에게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어떤 길들여짐도 경계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칭찬을 통한 가르침

어머니는 마흔에 나를 낳으셨다. 지금 여든 네 살이시다. 공부를 하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총기가 있으시다. 지금 내가 교육계에 몸담고 있고, 온 나라가 교육에 매달려 있지만, 어머님의 교육 방식은 딱 하나다. ‘칭찬’이다. 그런데 그 칭찬은 무관심을 바탕으로 한 칭찬이다. 내게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일상을 정성으로 마주하며 일구어내는 ‘소극적인 의사소통’을 통한 칭찬이다. 공명이 있어서 소리가 울려 퍼지듯 그러한 울림이다. 이것은 내 의식을 타고 오기도 하지만 분위기나 온도나 그윽한 바라봄 또는 애틋한 모습, 걱정하는 모습, 혹은 침묵을 통하여 발현된다.

이것은 교육 방식이라기보다도 자식을 우주의 인격체로 대하고 스스로 우주에서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하는 존재론적인 힘의 반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끔 학부형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식에 대하여 지극히 적게 알고 있음에 놀란다. 자식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춘기의 학생들은 골이 깊고 숲이 우거져 있는데, 부모는 자식을 민둥산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부모의 지식과 삶에서 터득한 방식으로 우격다짐 자식에게 투사시키고자 접근한다. ‘칭찬’과 대비되는 말은 ‘비난’이 아니라 ‘비교’이다. 배움은 받아들이는 것보다 선택이다. 선택은 일견 비선택을 속이는 양면이 있다. 그리고 ‘나’에서 ‘너’에게로 향할 때 기쁘고, 배움이 두려워질 때가 있으며, 배운 것 자체가 하나도 남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홀연히 세상이 다시 보인다.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소지공양

나는 어머님의 세월을 들여다 볼 수 없다. 다만 묵묵히 내게 주어진 계절을 성의를 다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어머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은 어머님이 살아오신 세월과 너무 다르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주변 동료의 부모님 상을 몇 차례 다녀오면서 기후 변화를 실감한다. 예전에는 연로하신 분들의 겨울나기가 힘에 겹다 하였는데, 요즘 같은 기후 변화라면 여름나기 또한 예전 같지 않다. 타산지석이라고 어머님의 용태를 더욱 살피게 된다. 막내가 할머니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했던 게 한 달이 되었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시고, 계단은 물론 평지도 잘 걷지 못하시는데 거의 매일 같이 바느질을 하신다. 직접 바늘귀에 실을 꿰면서 끊임없이 자르고 깁고 하신다. TV시청과 잠깐씩 주무시는 일 말고는 바느질을 하시면서 몸을 움직이시는데 사실은 흙기운을 더 밟고 싶어하신다.

허리에서 다리 관절로 이어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다. 병원은 안 가신다. 내 병은 내가 안다는 식이다.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저어한다. 그리고는 전부터 곧잘 쑥뜸을 뜨신다. 이번에도 고통이 심하셔서 직접 뜸을 뜨셨는데, 덧난 것이다. “예전에는 뜸을 떠도 살성이 좋아 곧잘 아물었는데, 오래 가고 아프다.” “어디 좀 보세요.” 나는 속으로 뜨거워지는 슬픔과 역정이 동시에 쏟아졌다. 이건 아니었다. 평소에 나는 잘난 척 하느라 “뜸이라는 것은 아픈 것보다 더 아프게 하여 아픈 것을 잠시 숨기거나 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은 내가 뜸을 떠 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어머님은 지근 거리에서 보아 왔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 문화이기에 언젠가는 뜸에 푹 빠져 살고 있을 나를 발견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있다. 이번 여름에 생각이 바뀌었다. “어머님의 뜸은 뜸이 아니라, 소지 공양이라는 것을......” 소지 공양의 대상 역시 어머님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의 삶 자체가 자신을 태워 가족과 우주로 나아갔다. 나는 무엇을 태워야 할까? 어머님께 어줍잖은 시를 하나 올린다. 태워야 할 것을 더 깊게 찾아야 한다.

내 안의 풀밭


- 온형근


있지도 않은 풀밭
뽑을 것이 있고 뽑지 않을 것이 있다는 구별
풀밭이 아니어도 괜찮다
나를 소용으로 하는 곳이면
가 닿을 수 있는 곳이면 끄덕일 수 있다
뽑을 것이 있어서 뽑지 않아야 할 것이
뽑히는 풀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다면
남겨진 풀에게 뽑히는 풀이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면
풀밭은 도처,에 널려져 있다
내가 그를 뽑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선택으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선택되어진 시선으로 풀뿌리를 털어내고
가끔씩 털어내려던 흙이 튀어 눈망울을 적시고
아련해진 눈망울 너머로 시린 하늘이 보이고
둔중한 어깨를 가로질러 나비가 살짝 노닐다 가는
사랑하지 않으면 온 몸이 저리고 아플
풀밭 매는 동안의 들떠 있음에
내가 풀을 매고 있는지
풀이 나를 거듭 매고 있는지
풀이 뽑혀나가는지
내가 뽑혀나가는지
남아 있는 게 오히려 풀밭이고
뽑아내고 있는 내가 잡초인
그래서 아직도
풀밭이고
잡초인
그 풀밭은 지금이고 여기인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속으로 영원히 왕성한 번식의 속성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