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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정갈하여 청랑한 왕솔농원

by 나무에게 2013. 12. 24.

정갈하여 청랑한 왕솔농원 / 온형근

방태산 휴양림을 찾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몇 가지 코스가 있지만 속사에서 운두령을 넘었다. 운두령송어횟집까지는 다녀보았지만 그 이상을 넘어간 적은 처음이다. 험한 운두령이다. 운두령 정상에서 정호와 운전을 도맡은 아내를 제외하고는 가지고 간 막걸리를 마시자 했다. 필영형은 그러는 것보다는 이곳의 막걸리를 마시자 한다. 그도 맞는 이야기라 막걸리와 도토리묵을 시키고 앉았다. 운두령 정상으로 치오르는 <얼음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다. 차다 못해 온 몸이 시리다.

차다. 차다 하면서 금년 들어 이처럼 시원한 경험은 처음임을 고백한다. 여행을 나선 사람들은 대개 이렇다. 여행 자체에 대한 예의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둘러보고 사진을 찍는다. 정호는 제법 참을성 있게 따른다. 차를 타고 다니는 일에 이력이 날만도 하다. 어려서부터 차를 타고 다닌 경력이 그러하다. 상남을 지나 휴양림 이정표를 따라 도는데, 최용건 화백이 들어가 살던 진동계곡이 마냥 궁금하다. 내내 살펴도 오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차 싶다 할 때 목적지인 왕솔농원이 나타난다. 속으로 아니라고 저어하였으나 분명 왕솔농원이다.

아직 해가 남아 있어 사람의 모습이 뚜렷하다. 안주인임이 분명한 분이 나오신다. 한 눈에 알 수 있다. 인사를 나누고 경계함을 그대로 받아 들이며 저녁 준비를 한다. 가지고 간 막걸리를 물줄기가 계속 쏟아지는 돌확에 담근다. 끊임없이 물줄기가 퍼올라지고 넘친다. 골목집에서 전해 준 삼계탕 5개 중 1개를 주인댁에 드리고 4개를 꺼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주변을 살폈다. 보호수로 지정된 300년 된 소나무는 젊고 싱그럽다. 나무 줄기와 가지, 잎 모두가 생의를 지녔다. 사방에서 바라본다. 싱그럽다.

마당과 밭 사이로 수로가 흐른다. 왕솔농원으로 도착하여 지나가는 수로는 모습이 다르다. U자형 수로를 타고 방태산 계곡에서 달려오는 물은 왕솔농원 입구에서 U자형 수로를 버리고 인근의 돌로 호안처리한 왕솔농원식 수로를 만나 흐른다. 바닥에도 돌이 깔려 있어 물소리가 멋지다. 의도가 돋보인다. 왕솔을 지나는 수로는 다시 U자형이 된다. 수로는 왕솔농원에 이르러 수로가 아니라 곡수연이 된다. 아주 속도 빠른 곡수연의 취향을 지녔다. 다만 되돌아 오는 것은 술잔이 아니라 청랑한 물소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맑은 물이다.

호안과 바닥의 돌들은 방태산을 닮아 있고, 계곡의 세월을 지니고 있다. 방태산의 흔적이 계곡으로 나와, 계곡을 지나 수로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평상에 앉아 저녁을 해결하면서 아직은 청랑하기만 한 물소리에 빠져든다. 일견 소화시키기 힘든 저녁을 마치고 산책에 나설 수밖에 없던 일행은 정호까지 동행한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펜션 일색이다. 휴양림 매표소까지 이어져 있는 펜션 일색에 눈짓을 주면서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와 어둠을 잇는다. 각자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정호는 의외로 잘 걷는다.

그렇게 1시간을 걷지만, 어둠이 깊어지고 되돌아 오기로 한다. 피곤한 몸들을 눕혀야 할 때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고자 했으나 부족하다. 간간이 별이 보인다. 잠들기 전 술 한 잔 첨가하기로 하나, 환영받지 못한다. 황토방은 조금 뎁혀놓았는지 덥다. 이불을 펴고, 내가 중간에서 사람들을 가른다. 정호의 잠버릇은 온 동네를 휘돌아다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피 잠이 들고 깨곤 한다. 문을 열면 시원한 산자락 바람이 거침없이 들어오겠는데 사람마다 달라 참는다. 무엇보다 모기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설치는 잠에 드느니 자주 바깥을 나온다. 시원함이 폐부를 찌른다. 호연지기를 배우는 사람처럼 심호흡이 잦다. 들락날락하면서 새벽을 맞이한다. 새벽은 여전히 내게 안온하다. 사진기를 꺼내 들고 왕솔농원 곳곳을 담아낸다. 일상적인 물건까지 담아낸다. 내 생각에는 이곳도 조만간 변할 것이다. 안주인의 전언대로 10년전 이곳에 정착할 때는 오지였단다. 그러나 지금 어찌 오지라 할 수 있겠나 싶다. 안주인은 안주인대로 산책을 하고 있다. 일상의 주요한 행위를 엄숙하게 실행하고 있음이다.

나는 나대로 모른 채 내 일에 몰두한다. 소중한 시간들은 어느 경계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용건 화백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손바닥을 마주하며 다리를 껑충한다. 이 분은 좋은 이야기에 손바닥을 마주하며 다리를 껑충하는 특유의 몸짓을 곁들이고 있다는 것을 돌아오는 회상에서 발견한다. 최용건 화백도 왕솔농원처럼 이곳에 들어온 초기 이주민이다. 10여년의 세월을 지낸 것이다. 그러나 진동리도 이곳 왕솔도 오지는 아니다. 10여년 전 최용건 화백의 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던 한국의 오지에 대한 내 상상력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얼마전 평창을 다녀오면서 속으로 웅얼거렸던, 전기도 차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적당한 땅을 찾아달라는 말은 지금도 입안에서만 웅엉거린다. 너무 외진 곳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왕솔의 안주인처럼 <주변이 궁금하여> 여기 저기 나서면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는 오지 삶의 단편들이 참 좋게 들린다.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선한 얼굴들이 상상으로 그려진다. 최용건 화백도 라다크를 다녀오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미고 있다. 조금 전 그의 홈페이지에서 1층까지 지어진 집을 사진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근처에 오면 꼭 들르라던 최화백님의 덕담을 실천하지 못한 일정 때문이라도 새로 만드는 곳은 꼭 다녀오고 싶다.

왕솔농원의 생활은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에 의해서 정갈하게 구분된다. 그 경계에 심어 놓은 벚나무와 사과나무, 자두나무 등이 꽃잔치를 수놓을만하다. 떨어지는 벚꽃, 복사꽃, 자두꽃 등이 흐르는 물에 낙화되어 둥실 떠다닐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눈물겹다. 물을 건너 심겨진 고추, 배추 등 채소밭은 일상의 손길을 부른다. 잠시도 가만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왕솔농원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정갈함> 그 자체라면 정갈함에 녹여 든 주인 내외의 손길은 또 얼마나 정갈할 것인가? 잠시라도 머뭇대거나 못 본 척 외면할 수 없는 일상을 이렇듯 정갈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작심>만으로 곤란하다.

왕솔농원은 계절마다 새로운 옷을 입을 것이다. 내가 만난 7월 초순만으로 나머지 모든 계절을 알아차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계절과 풍경을 바라보는 내 이력에는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안주인의 안목이 또한 그러하다. 살면서 많은 흐뭇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연장선상에서 왕솔농원의 안주인이 심겨진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진 내 안의 어떤 아이콘 속에 녹여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안주인의 문을 잠그고 여행을 다녀올 수 있기를 꿈꾸는 일은 그래서 가능할 것이다. 사람과 풍경 속에 왕솔농원이 서 있어야 한다는 뚜렷한 명제 하나가 그곳에 떠나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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