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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白藝術

아암 혜장, 금산의 골짜기

by 나무에게 2013. 12. 24.

 

 

금산의 골짜기 / 아암 혜장


금산의 골짜기가 작기가 술잔만 해도
산 빛으로 문을 열면 바다 빛이 다가오네.
앉아 석양이 닿도록 자리는 항상 그늘졌으니
이름 모를 산새들이 향대로 날아 내려오네.

임종욱, 우리 고승들의 선시세계, 보고사, 2006.10.,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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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의 제목이 없어 앞부분을 취한다. 선시를 인용하고는 책을 덮는다. 아암 혜장 스님은 다산 정약용 선생과 교류한 분이다. 다산 관련 책을 읽다보면 다산과 혜장 스님이 주역에 대하여 논하는 광경이 나온다. 그만큼 주역에 밝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부분 다산 관련 책에는 다산이 주역에 이르러 혜장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는 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말 그대로 하나의 어떤 일화였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혜장이 그 정도로 물러날 계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장수한 다산과 짧게 살다 간 혜장의 차이일 수도 있다. 이 시를 썼을 당시 혜장이 머물던 곳이 궁금하다. 그곳에 지금도 암자 하나 짓고 문을 열고 내다보면 작은 골짜기로 우주가 열릴 것이다. 그런데 골짜기의 크기를 술잔만 하다고 했다. 혜장스님이 평소 술을 좋아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 문을 연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빛에 산, 바다가 있다. 산에서 바다를 보고 빛에서 향을 맡는 스님이다. 석양은 그늘진 곳으로 닿으려 하고, 산새들은 향을 찾아 내려온다. 나머지는 모두 덧칠이다. 골짜기가 바라보이는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술잔만한 골짜기이지만 바다 빛이 다가오는 문, 그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싶다. 
(2008. 01. 22.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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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1811년 북암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북암은 초의선사가 40년 동안 주석했다는 일지암과 가까운 산등성이에 있는 암자다. 그 암자에 서면 양편으로 산줄기가 휘감아 돌고 그 아래 가운데가 대흥사다. 멀리 장춘동 골짜기가 한눈에 잡힐 듯 펼쳐져 있다. 아마도 이 시는 그 북암에 있으면서 쓰여졌을 것이다.(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