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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안락018-安樂

by 나무에게 2013. 12. 23.

안락018-安樂 / 온형근



수공 중 제9식이 안락식이다. 1식을 배우고 2식부터 8식까지 건너 뛴 셈이다. 교재를 보니 1식은 안신식安神式이고 2식은 강혈식降血式이다. 3식은 보정부혈식保精扶血式, 4식은 회양장력식回陽壯力式, 5식은 보허환양식補虛環陽式, 6식은 조기부심식調氣扶心式, 7식은 보간명담식補肝明膽式, 8식은 부비건위식扶脾健胃式이다. 그리고 오늘 배운 것이 안락식安樂式이다. 건너 뛴 것이 있으나 다시 배울 틈은 없다. 도장에 가면 모든 것이 다르다. 자세와 분위기 그리고 자세가 달라진다. 이런 게 기장일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좋지 않은 수련생이다. 불량 수련생, 그렇다. 믿음이 굳지 않다. 매사를 기꺼이 받아 들이지 않고 있다. 가슴을 열라 한다. 받아 들이라고 한다. 내 인지적 사고는 그래야 한다고 분명하게 인지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주 벗어난다. 기다렸던 사람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한다. 기가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일까.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허망한 꿈을 지니게 하였을까. 정말 내가 지닌 이상은 무엇인가. 어디서 어긋나서 이토록 좌절하고 있는가. 현실에 좌절한 사람이 대안으로서 도가 수련에 이르는 것을 역사의 내재적 현실로 치부하여야 하는가.

속절 없이 가벼워야 한다. 내 현실은 그림도 그럴싸하고 문장도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의 진부한 속기까지 있다. 건달기도 있으면서 선비기도 있어야 한다. 그러한 여정을 꿰뚫고 있는 것은 진실이다. 내 진실은 뜨겁다. 밭에서 풀을 뽑더라도 온 몸을 내 던져 바닥을 기는 무지함이다. 삶이 무지하고 일견 거칠어보이다 보니 내가 풍기는 기운은 가볍고 건달적이고 쉽게 여겨지나 보다. 진실에 기대어 나를 학대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를 쉽게 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어쩌랴. 죽어도 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자신을 사람들 누구나 쉽게 대할 수 있도록 조련한다. 그래 놓고는 쉬운 대함을 받을 때 고개를 돌린다. 짜식이, 뭐야 이거, 내가 그 경지까지 갔을 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건너 뛰어 소화한 연후인지 아는가 말이다. 본질의 차이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내 한계다. 벽을 세워 둔 위치다. 깊게 그리고 넓게 사유하며 반성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 혹독한 조련의 광활한 야단법석을 동반한다. 그래야 고요해지며 나를 가라앉힌다. 가라앉힌 후에야 사람에게 나를 내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나보다 남을 더 의식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럴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고 살았다. 약지 않았다. 약아야 할 부분에 도달하면 더욱 더 그러할 수 있는 소지를 철저히 배격하고 치우고 내던졌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약음이 있을까. 오늘은 알 수 있다. 조련의 광활한 야단법석 이후에 고통스러운 육체를 위무하는 데에 약은 것이다. 엄살이 많은 것도 그것이다. 아프기도 많이 아프지만, 아픈만큼 나를 투시한다. 육체를 투시하지만, 사실은 마음을 투시한다. 많이 아프지 않아도 아파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1식과 2식은 워밍업 기간에 배웠다. 다만 3식에서 8식까지는 모른다. 가만 보니 3식에서 8식까지가 모두 아프지 않게끔 예방하고 치유하고 의념으로 명상에 이르는 기공이다. 5자로 된 성어다. 5자성어를 건너뛰니 1식과 2식처럼 간단한 3자성어인 안락식이다. 내게 5자성어는 인연이 먼 셈이다. 3자성어로 이루어진 수공으로 만족한다. 안락식은 이렇다. 1식은 온 몸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라면, 2식은 하전 이하의 하체를 위주로 혈압을 내리거나 올리는 수공이다. 9식은 상단전이라 할 수 있는 양미간에서 우주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다.

9식인 안락식은 원하는 것을 꿈꾸면 그림으로 나타날 수 있다. 내가 꿈꾸는 그림을 볼 수 있으려나. 그러나 충분한 공력과 수련이 뒤따르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할 수 없다. 5분 정도 하고 나서 1식과 2식을 한다고 했는데 그대로 9식 하나로 수련을 마쳤다. 마무리 수공과 봉고까지 하고 나니 시간이 이르다. 심교수님은 오늘 늦으셨다. 보이차 한 잔만 마신다. 심교수님께 바깥에 있겠다 여쭈고는 그대로 신호등을 건너 집으로 향했다. 나사 빠진 상태다. 전화기에 찍힌 오래된 선배에게 전화하니 어디로 오라한다. 그냥 집으로 왔다.

불량 수련생은 여주 능서에서 사온 막걸리를 마신다. 막걸리를 마시는 시간이 좋다. 다만 집에서 마시는 일은 드물었기에 눈총이 심하다. 내 기운에 질러 눈치를 보고 있지만 막걸리는 어렵지 않게 마실 수 있다. 수공은 불량 수련생에게 매우 유용하다. 내가 지금 나를 불량 수련생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을 보니 대성은 멀다. 한 달 후쯤이면 성취가 달라 질투하고 한다는데 나는 이미 그 상황은 사전에 차단했다. 이것은 대성의 기미다. 아님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유혹에 가까워지지 않아서다. 여전히 나는 구제받기 어려운 사유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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