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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야생성의 사유

by 나무에게 2013. 12. 24.

후배가 소나무 재배에 관심이 있어서 양동 단석리 백송원을 다녀왔다. 백송원에서 풀어 기르는 개가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내를 하였는데, 갑자기 그 개가 달리더니 꿩이 냅다 난다. 날아간 꿩을 향해 달려가는 개를 바라보면서 신통하게 생각했다. 아마 놓친 게 분할 것이고, 꿩의 야생성에 비기지 못한 게다. 산을 내려와 그 이야기를 하니, 어제는 너구리를 잡았다고 한다. 놀라서 자세히 물으니, 숲 속에서 개짖는 소리와 함께 너구리 소리 지르고, 몸뚱아리가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더라는 것이다. 묶여 있던 진돗개까지 그쪽을 향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진돗개를 풀어 주니 냅다 그 소리나는 숲을 향해 달려갔고, 한참 후 가보니 너구리가 잡혀 있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너구리를 나포해 집에 둔 다음날 너구리는 죽었다고 한다. 야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사유하게 된 날이다. 야생에서 너구리는 종이 다른 개와 싸웠고,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아직 싸울 힘은 남아 있었음에도 잡힌 것이다. 최선을 다하여 죽을 힘을 더하여 싸운 게 아니다. 자포자기한 것이다. 이제 나를 잡아 먹으라고 몸뚱아리를 내 준게다. 약육강식의 야생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기르는 사냥개는 그렇지 않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야생의 동물들은 서로 다른 종과 싸울 때, 일정 부분 상처를 입으면 도망가거나 도망갈 만한 상태가 아니면 쉽게 자진하는 것이다. 이것이 야생의 유전자이다.

야생성이 사라진 것들은 그렇지 않다. 끝까지 갖은 방법과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여 끝까지 저항한다. 고라니도 그렇다고 한다. 구덩이로 함정을 파고 위장 해 두면 그곳에 빠지는데, 다음날 가보면 열이면 열 모두 이미 숨을 끊은 상태라는 것이다. 빠졌으면 힘이 소진되지 않도록 한쪽에 가만히 있으면서 생을 이어가야 할 것 같으나, 밤새도록 가만 있지 않고 나대다가 지쳐서 죽게 된다. 이런 것이 진정한 야생성인 것이다. 야생성이란 교활하지 않다. 야생의 유전자는 그만큼 눈물겹도록 비장하다. 사람 또는 사람에 길들어진 것들은 그렇지 않다. 야생성을 상실하고 대신 야생성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래서 야생보다 더 무서워져 있다.

진정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어쩌면 야생성을 지니는 것일지 모른다. 억지로 만들어가는 것처럼 힘든 게 없다. 뭔가를 모색한다는 행위 자체가 하루를 잡아 먹는 일이 있다. 모색하는 것은 그만큼 야생성을 상실하는 일일지 모른다. 살면서 만들어진 야성에서 나오는 방식은 시원한 진행을 유지한다. 진행 과정에서 얽히고 설키는 것들이 야생성을 해치는 일들이다. 자칫 모색하는 것 자체가 삶의 원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와중에 야생성을 지닌 동물의 자진이 주는 의미는 크게 다가온다. 졌으면 졌다고 인정하고, 내가 필요하다면 내 몸뚱아리를 내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온전히 어떤 목적에 투여하여 달려가는 일 자체가 나쁘진 않다.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가는 것은 무리다. 야생을 지닌다는 것은 나를 바르게 쳐다보는 부지런한 사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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