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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연필 속으로 잠기는 것이었다

by 나무에게 2013. 12. 23.

연필 속으로 잠기는 것이었다 / 온형근
  


연필깎는 의지에게 칼이 주어지지 않았던 그날
닳다가 돌려지는 흑연가루의 안타까운 절규앞
연필 깎는 시간이 유난히 긴 내게
손톱으로 연필 끝을 후비거나 끌처럼 밀어올리거나
칼을 찾다가 까만 점을 속살로 가리고 있는 틈새로
숨통을 열어본다. 터지지 않는 동안 세워보고 눕혀보고 돌려보았다.
연필깎는 시간에 뭐 이리 더듬거리는가 싶어 주방 부엌칼을 꺼냈다. 연필을 깎는 순간 연필 깎는 칼로 묵직해졌다.
손잡이 근처 각진 칼날 부분으로 부드러운 속살을 벗긴다. 멀찌감치 허리를 내밀며 속살이 드러날 때의 매무새를 지극하게 여기며 벗긴 자국이 잔물결로 가슴을 어루만지도록 살결을 두루 다듬는다.
속살 무늬가 훤하게 드러나는 동안 깎아지른 듯 각선미를 두른다.
가끔씩 칼날의 무도 앞에 흑연이 상처투성이로 숱한 절벽을 이룬다.
연필깎기가 끝나면 벗긴 옷매무새 부분에서 내 손이 머물 것이고
내 너를 쳐다보는 속살의 아찔한 각선미 밑둥에서
까만 너의 눈망울이 구르고 나는 미끄러지듯 연필 속으로 잠기는 것이었다.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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