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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우리 세대의 신화와 나무

by 나무에게 2013. 12. 23.

우리 세대의 신화와 나무 / 온형근



우리 세대의 신화에 살고 있다. 우리 세대의 신화는 숱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과제는 뭐니뭐니 해도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접근 방법의 창출이다. 환경은 특정 한 세대에 주어지고 수행되며 끝나는 과제가 아니다. 우리가 동서양의 신화 속에서 새로운 시대마다 그 시대의 정신적 창을 얻어왔듯이, 우리 세대의 신화는 환경에 대한 신화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얻어야 한다.

다음 세대들이 우리 세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들에게 우리 세대는 무엇을 자랑스럽게 내 줄 수 있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 세대들이 지금 우리 세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 세대의 신화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그 신화적 요소는 환경이라는 바탕몸에 뼈대로 기인한다. 나무에 대한 체득화된 친화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신화와 나무에서 비롯되는 발상의 출발을 주저할수록 환경이라는 모태는 우리 세대를 떠난다. 생명을 상실해 나갈수 있다. 숲을 되찾아야 한다.

나무와 더불어 사는 민족은 흥하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망한다. 사람 각 개인의 나무에 대한 관심은 다양하다. 나무에 대한 다의적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이토록 나무의 다양함과 어울리는 동안 신화가 만들어진다. 나무는 곧 큰 문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신화는 후대들에게 고스란히 아름다운 신화덩어리로 남는다. 오래도록 노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세태는 보다 쉽고, 보다 안락하며, 보다 단순하며 권선징악적이어서 보다 잘되는 것만을 선호하고 있다. TV의 많은 드라마가 이렇다. 보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실패한 신화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 공공성이라는 것은 대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여정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TV 프로그램이 제작된다고 한다. 과연 그러할까. 일전에 KBS에서 <꽃들의 전쟁>이라는 특집을 2 회에 걸쳐 방영하였다. 밀착된 문제의식으로 풀어 가는 공공성을 갖춘 프로그램이다. 자연스럽게 우리 세대의 신화를 일깨워 주고 있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이 프로그램을 보여주었었다. 아이들은 분노하고 한 마디씩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다. 이제까지 비디오를 보여주었을 때 그것이 교육 프로그램이든 영화이든 아이들은 반은 자고, 반은 보고 시큰둥한 반응이었음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성화와 관심은 새로운 관점의 신화적 삶의 형태가 필요하다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녀노소가 일깨워지는 관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식물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은 곧 우리 세대의 신화를 회복하는 일이다.

환경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법은 상당히 진보되었다. 서양의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철학적, 과학적 논리에 대비하여 동양의 가치와 철학은 매우 환경친화적이다. 물론 고대에는 동서양이 똑같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지냈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들의 신화에는 나무에 대한 부분이 상당수 있다. 나무에게서 사람들은 신을 느꼈고, 그 나무는 결국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단군 신화에서 나타나듯이 태백산 위의 신단수 역시 초우주적 존재와 사람과의 매개체로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 나무는 삶과 존재에서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부담으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에게서의 깊은 사색으로 신화를 꿈꾸고 있다.

나무를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이를 통하여 생명에 관계된 수많은 물질을 얻고 이것이 곧 부와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의학은 식물에서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끄집어내는 과학이다. 곧 자연을 관찰하는 속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함께 공생하고 있다. 놀라운 깨달음이 비롯된다. 깨달음이 있기에 나무를 비롯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해왔다. 살아있다는 깨달음과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현실감이 과학 속에 있어야 한다. 나무는 사람의 간섭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은 오래 사는 나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신화를 만든다. 오래 살 수 없는 사람의 유한성 속에서 자연을 바라본다.

나무에게는 나름대로의 질서에 의한 오래된 삶의 형태가 있다. 변화된 상황에 뿌리 없이 흘러 다닐 수 없다. 그리고 이동성이 없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동성이 인류를 발전 시켜왔고, 무소권능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의 타락도 동시에 심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제 분수를 모르게 한 것이다. 사람만이 분수를 떠나 살 수 있는 독특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분수를 알고 살 수 있는 나무는 신화를 달고 사는 것이다. 분수를 알고 사는 사람에게 신화가 깃든다. 신화를 꿈꾸는 사람이 곧 사람됨의 척도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에서 그것도 나무에게서 사람됨이 흐트러질 때마다 주의와 경고를 스스로 주고받는다. 사람됨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살이가 험악해지고 사람과의 정을 지키기가 점점 어려워지고들 있다. 이럴 때일수록 나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가치가 생긴다. 나무를 관심 있게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곧 산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연과 인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된다. 국가에서는 환경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정책과 교육을 펼쳐가고 있지만, 그 근원적 교육은 나무를 배우는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세대의 신화와 나무를 개척하고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아직 없다. 다만 나무를 보다 가깝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간곡히 바라는 따름이다. 결국 나무를 통하여 생명에 대한 보다 확대된 의식을 공유할 수 있기를, 그 저변인구의 확대를 바랄 따름이다. 꼬집어 어떻게 전개하겠다는 의식보다는 쉽게 접근하여 큰 의미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나무에 대하여 밝은 자세로 대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나무에게서 우리 세대 신화의 활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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