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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원칙과, 원칙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사색

by 나무에게 2013. 12. 24.

원칙과, 원칙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사색 / 온형근

새벽 산행을 오랜만에 하게 되면 조금 벅찬 몸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그럴때면 조금씩 사유도 벅차진다. 마음의 움직임이나 미세한 감성의 흐름이 주로 감지되는 새벽 산행이었는데, 이런 날은 주제가 무거워지는 것이다. 겨울산과 달리 여름산의 새벽이라는 게 늘 동터 오르는 밝음과 함께 한다. 새벽 산행으로 선택한 야트막한 산은 주로 노인들의 산책 코스다. 노후를 미리 볼 수 있는 임장감이 있다. 내게 나무를 가르친 많은 분들 중에 이창복 교수와 임경빈 교수가 있다. 오늘 새벽 산행은 갑자기 두 분의 이름으로부터 사유가 시작된다.

이창복(李昌福)교수는 얼마전에 84세의 노환으로 별세했다. 1957년 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63년 서울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식물분류학의 대가로 생을 살으셨다. 그 중 대한식물도감은 전공자에게 교과서처럼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임경빈(任慶彬.80)교수는 1940년 대구공립농림학교 진학을 시작으로, 미국.스웨덴에서 임학을 공부한 뒤 전북대.서울대 농대 등에서 30여년간 산림자원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등 평생을 나무연구와교육에 쏟았다. 나는 공교롭게도 두 분에게 모두 강의를 들었다.

시대마다 늘 똑같지는 않으나 짝을 이루는 좋은 동료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시 서울농대에서 이창복 교수와 임경빈 교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였다. 각자의 주어진 길을 소신있게 추구하며 미래를 개척한 분들이다. 그러나 가는 방법은 달랐다. 이창복 교수는 식물분류학의 대가답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철두철미한 교육 철학으로 학자의 길을 걸었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가는 길이 뚜렷하기에 두려움이나 서성거림이 없었다. 임경빈 교수는 약간 다르다. 얼마전에 시집을 내셨을 정도로 풍부한 감성으로 산림 생태계만큼 다양한 사유를 하신 분이다.

일찌기 이창복 교수가 식물분류학, 수목학, 대한식물도감 등의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저술로 완벽한 학자의 기본을 갖추었을 때, 임경빈 교수는 조선일보에 나무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나무박사의 다양한 지적 편력을 일반인들에게 고루 나누었다. 두 분 다 자기 자신에게 무척 엄격하였을 것으로 안다. 하지만 지적 사유에 있어서, 사유방법에 있어서 서로 다른 독특함을 지녔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전망과 미래에 대하여 흔들림 없이 정진하였다. 학생들도 전공이 아닌 대기업의 사원으로 진로를 바꾸는 시대임에도 뚜렷한 길을 걸었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지녔기 때문이다. 두 분 교수가 80이 넘으시고 한 분은 작고하시고 한 요즘을 보면 더욱 그러한 전망에 대한 탁월한 정진이 돋보이게 된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 힘입어 젊은 임학자나 식물학자들이 베스트셀러의 책을 만들고 있다. 사진으로 만들고, 계절별로 만드는 꽃, 나무, 식물 도감들이 비싸게 만들어져 팔리고 있고, 식물에 얽힌 인문사회학적 이야기와 곁들여 재미있게, 접근하기 쉽게 풀어쓴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이창복 교수의 딱딱하기 그지 없는 저술들은 최근에 전개되는 젊은 학자들의 도감의 원전이 된다. 임경빈 교수의 나무백과 시리즈는 자연과학자가 인문사회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저술한 입에서 입으로 꼬리를 물며 소문난 명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임경빈 교수의 나무백과로 자연과학에 접근하였다. 이창복 교수의 빈틈없이 전개하는 강의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였던 것도 그것이다. 반면에 임경빈 교수의 꿈꾸는 듯한 경계를 넘나드는 강의는 졸음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자연과학적 소질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접근하여 여기까지 온 것도 큰 복이다.

자연과학 또는 이공계가 모두 어렵다. 원칙과, 원칙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사색이 짝을 이루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사회가 되었다. 힘있는 원칙을 지닌 그 분야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강한 원칙을 지닌 분이 있을 때, 원칙을 지닌 다양한 틈새를 만드는 분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호작용한다. 어느 한 쪽이 없을 때 둘 다 빛을 내지 못한다. 이창복 교수와 임경빈 교수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분들이다. 미래를 보는 눈은 전공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끊임없이 사색하며 개척해가는 비전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미래는 진정한 복지 사회를 향한 여정에 놓여 있다. 조경이 가진 자를 위한 전공분야이고, 실업교육이 숙달된 기능인력을 제공하기 위한 교육이라 여겼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경 역시 신체장애자를 위한 정원이나 정신 치료를 위한 정원을 조성하는 데 역점을 두는 비전을 지녀야 하고, 실업교육 역시 소외받는 계층의 인간화와 행복추구권을 위하여 기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기본적인 원칙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외적 자극과 강요에 맞설 수 있는 비전을 지녀야 한다. 원칙이 지켜질 때 더 많은 틈새로 미소를 지닌 삶이 엮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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