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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윤선도 부용동 원림_물과 출처관

by 나무에게 2013. 12. 24.

몸을 내가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 아닌 시원의 작용도 함께 하고 있다는 유전적인 믿음이 생겼다. 그것이 물이다. 탁영탁족 역시 물에서 이루어진다. 제천의 탁사정이 그렇다. 휘돌아 흐르는 기막힌 경관 속에 숱한 사람들의 영혼이 머물렀다. 제천에 가면 관람정이라는 곳이 있다. 여울의 급한 물결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 여울 속에서 옛사람들은 고전의 향내를 여미며 돌아볼 수 있다.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 원정은 그야말로 물에 대한 사유의 극점을 연출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정원에 물요소를 도입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수원의 공급과 방수시설, 수문 조절, 유형, 형태, 연출, 이용 등으로 나누어 세부적인 고려사항을 제시한 표다.
물은 동양 삼국의 전통 정원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조경가 계성은 그의 책 원야(園冶)에서 좋은 원림지로는 용수(用水) 및 수경(水景) 차원에서 물 확보가 중요하다고 한다. 특히 산림 속에서의 원림 조영은“깊이 들어가 수원을 찾아내고 그 물길을 원림터까지 끌어오며, 때로는 낮은 곳을 파 못이나 웅덩이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고산 윤선도는 어떤 사람인가. 천문, 지리, 의학, 역학,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조예가 깊었던  소위 도가 트인 인물이다. 그는 조선에서 무학대사 이후 최고의 풍수가다. 윤선도가 죽은 후 정조대왕이 한 말이다. 그의 풍수학적 식견은 찾아내어 원림으로 조영한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 그리고 부용동 등이 풍수이론의 실제 현장이라고 한다. 이렇게 답사 다니는 방법은 없을까.
물은 천태만상을 이룬다. 그 깊이는 이슬의 흔적에서부터 심연에 이른다.
움직임은 스며 나옴에서 물보라, 흘러넘침, 분출, 급류, 폭포수에 까지 걸쳐 나타난다.
소리는 재잘거림에서부터 노도의 울부짖음까지 이른다.(Simonds, 1999: 65)
John O. Simonds(1999), Landscape Architecture, 3rd ed. McGraw-Hill.
사이몬이 말한 물의 유형과 형태, 연출, 이용에 관한 맥락이다.
보길도는 연화부수형의 형국을 지녔다. 격자봉 주맥 내룡터에다 자신의 주거처인 낙서재를 지은 것, 압승과 허결의 비보로서의 각각 동천석실과 조산을 마련한 것, 그리고 외수구 직사에 따른 허결의 비보로서의 세연정을 조성한 것 등을 보면 부용동 전체가 고산의 풍수적 안목이 집결된 대표적인 현장이라 할 만하다. 외수구에 해당되는 지점에다 직사되는 물 흐름을 막아 잠시 머물게 하여 기를 응축시키기 위해 조성한 비보책이 세연지라는 것이다. 기를 머물게 한 세연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연정 일대가 유역의 본류에서 벗어나 지류에 위치한 것은 홍수의 피해를 고려한 것이다. 상류의 입수부에서 수로가 두 번 꺾여 들어오는데, S자 형의 수로라 할 수 있다. 상류로부터 S자를 그리다 보면 S자 끝부분에 돌출수제가 있다. 인위적으로 제방을 쌓은 것인데, 이는 물길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나서 다시 칠암이라는 자연석 군(群)이 있어서 상징과 경관과 물의 흐름을 조절한다. 얼마나 과학적이고 멋진가. 그렇게 계류가 흐르면서 굴뚝다리라고 부르는 판석보에 이른다. 판석보는 수량이 적으면 다리로서의 기능과 경관을 연출하고, 물이 많으면 폭포의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 물은 이 판석보에서 휘돌아 하류인 방지로 들어간다. 상류인 계담에서 하류인 방지로 들어가는 수구는 5입3출과 고입저출로 이루어져 있어 수압의 이용과 수면의 고요함을 노린다.

윤선도의 출처관은 특별나다.

 

보길도를 가려면 땅끝마을에서 서성대는 시간이 소요된다. 최소한 자거나 마시거나 먹는 일이 땅끝마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지금 생선회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기세등등 생선회가 주문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기세가 죽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회 초년 시절에는 삼겹살 집에만 가도 기가 죽었다. 떠들다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용히 맨소주만 마시던 기억이 새롭다. 회식이 끝나면 포장마차에 가서 입에 맞는 국물있는 것과 술을 또 마시곤 했다. 그런 것들이 내 비위의 순수함이었다. 그러니까 올바른 비위, 막강한 비위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고기는 싫고 술은 마시자니, 동료 취향에 이끌려야 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군에 다녀와서 조금씩 고기를 먹게 된 근래에는 소주를 마시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막걸리에 고기가 어울리지 않으니 당연히 고기 먹는 실력은 그저 그럴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횟집에 가면 가시방석이었다. 비싼 회를 먹는데 다른 토를 달 정도로 뱃심은 없었다. 다 좋아하는 일에 나 하나 딴소리를 할 정도로 불편하지 않기도 했다. 함께 나오는 이것 저것에 손이 가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도시 방문을 했을 때, 일부러 찾아왔다고 복잡한 도시를 돌고 돌아 회를 시켜 주었는데, 이날 따라 나는 한 젓가락도 회에 손이 가지 않았다. 물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았다. 그날 나는 어디 청국장이라도 먹고 싶었을 것이다. 물을 마시면서 그 시간을 지냈다. 그러다가 횟집 주인이 특별히 전어회를 한 접시 내 주었다. 먹어 보라는 것이다. 내가 병원에 전격적으로 입원한 날이 8월23일이니까, 8월22일 오후의 일이다.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기막힌 비유에 끌렸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섯 젓가락 정도 들었을 것이다. 그게 다다. 아직도 전어회를 먹었기 때문에 간염 수치가 높아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이후 퇴원해서 내가 병원에 입원한 여러 소문들 중에 하나가, (그 중 하나는 술일테고, 또 하나는 격무, 또 하나는 정자 만들기, 또 하나는 더위먹은 일(열사병, 이것은 아주대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진료한 의사선생님의 추정), 그리고 스트레스 등등) 전어회를 먹고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주로 남부지방 출신 선생님들이 한 말이다. 심지어는 정보를 달라고 해서 뭔 말이냐 했더니, 전어를 어디서 먹었느냐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니까, 그 집은 안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병원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 여름에는 생선회를 먹지 말라고 한다. 그것을 나는 내 몸의 느낌에 결부시켜 본다. 아예 생선회 근처에는 가지 마는 게 바람직하다고 스스로를 교육시킨다. 보길도에서도 그랬다. 윤선도의 세연정을 다시 본다는 기쁨과 특히 동천석굴을 보게 된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그날 저녁 횟집에서는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회에 손이 가지 않았다. 따로 된장찌개를 시켰으니 말이다. 예전에 친구를 만나러 진주에 갔다가 삼천포(지금은 이름이 다른데?)에 갔었는데, 호기롭게 회를 시킨 바다에 뜬 배 위에서도 나는 자장면을 시켜 먹었던 일이 있다.
그러고 보니 횟집에 얽힌 일이 꽤 된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왠 술집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사진기를 빼 놓고 답사를 다니면 왠 사진 찍을 일이 그리 많은지 모른다. 병원에서 이틀 동안 나는 요단강을 넘었다 돌아오곤 했다. 이거 오늘 완전히 병원 이야기로 초를 치네. 아무튼 이렇게라도 적어 두면 답사 때 아팠던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지는 않겠지. 미리 사설을 깔아 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간 수치가 8,000이라는 어마어마한 객관적 사실에서 2일 동안 헤맨 사람이다. 건너갔다가 되돌아오지 못할 상황이었다. 다랑쉬 답사가 남아 있어서 아쉬워 돌아왔을 것이다. 허깨비처럼 별 것이 다 보였었다. 특히 나는 금강산, 설악산 같은 명산 대첩의 기기묘묘한 풍경이 자주 보였다. 실제처럼 생생하고 자세하고 정확한 그런 풍경들이 자주 찾아왔던 것이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가 실제처럼 보였다. 나는 보이지 않고, 나는 어디 높은 곳에서 그 풍경을 넉넉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수치가 가라앉을 때는 보길도의 동천석실이 보였다. 거기서는 정자 앞 큰 바위에 내가 앉아 수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락가락 수치가 높낮이를 거듭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순전히 내 의지로 병마와 싸웠던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그 이틀이 지나간 것이다. 비몽사몽이라는 상태였다. 나와 내 주변 모두 멍청하게 그 시간들을 보냈던 것이다. 내게 있는 또 다른 우주만 바쁘고 험로를 오고 가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에도, 그 이후 오랫동안 곡기가 돌아오는데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틀을 견뎌낸 게 지금까지 살아왔던 순정한 기운이다. 그 순정한 기운은 그렇게 소모된다. 그리고 조상님들의 공덕이다. 특히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탁영탁족의 삶으로 일관한 풍류 남아들의 음덕이다. 몽유도원도 같은 기기묘묘한 풍경을 내 생전 본 적도 없거니와 내 수련의 깊이 또한 얕기만 한데, 앞으로 보다 많은 정진을 하라는 은근한 부추김이다.

한국주택관리신문, 2010년 2월호 원고 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