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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적기賊機와 줄탁동시

by 나무에게 2013. 12. 24.

적기賊機와 줄탁동시


한 학년을 마치면서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건 적기라는 말이다. 賊機라는 말은 도적의 낌새를 말한다. 내가 가르치는 조경 교육, 그리고 초보자에게 조경학과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을 이끌고 속성으로 조경을 가르쳐야 하는 일이 내 일이다. 그래서 거기서 기사 시험을 보게끔 이끌고 있다. 그러기에 보통의 느긋한 교육, 패턴에 익숙한 교육 방식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교육 방식이 바로 선승들의 선문답에서 회자되는 賊機라는 말을 떠올린 것이다. 그랬다. 내가 학생에게 바란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슬기와 지혜, 망상, 집착, 그리고 살아온 자기 자신 같은 것을 남김없이 빼앗아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살아 남을 것이라는 강한 교육 방식이다. 내가 그들의 슬기를 뺏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대도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자꾸 뺀다. 살아온 지식이 있고, 자신의 설정한 속도가 있고, 자신에게 편하게 얹혀 놓아야만 다음이 시작된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충분히 가능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의 이 교육과정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혼자 지도하는 조경이다. 학생들은 뭔가 선택에 의하여 내게 온다.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성과로 이끄는 방식은 내가 그들의 지혜와 슬기를 빼앗아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1학기, 또는 1년 동안 내 춤에 놀아야 한다. 함께 추고 놀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내가 좀 더 역동적이지 못하였는지 모른다. 아마 조금 방식을 바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약하게 이끌었지만 이 방식도 의미는 있었다. 그들의 생각을 이끄는 賊機 교육 방식이 옳다는 생각을 더 굳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춤에 함께 동참하는 것은 곧 줄탁동시의 교육 방식을 추구함과 같다. 안에서 쭉쭉 빨아대고 밖에서 쪼아 내면서 알을 깨어 나오는 방식이다. 여기에 어떤 의심이나 고려나 배려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한가지 생각만으로 빨고 쪼는 일이 되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설정한 도적의 낌새 교육이다. 그들의 슬기를 훔쳐내서 잠시 멍하게 되게 하고 그런 연후에 입었던 모든 옷을 벗어 던지고 한 가지 일로 매진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지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조경기사 속성 교육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그러나 이번 학생들에게 賊機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것 같다.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들의 판단과 자신들의 진도에 맞게 나를 오히려 재단하며 내 교육을 따라 온 듯 하다. 나 역시 처음에 자신 있게 賊機를 던져 내며 단단하게 이끌려고 했는데, 중간에 흔들렸나 보다. 내 방식에 내 스스로 무기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어찌하면 이런 교육 방식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학생들과 줄탁동시의 관계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좀 더 관망하고 오래 생각해야 할 일이다. 왜 학생들은 자꾸 자신의 기존 개념과 지식에 더 많이 집착하는 것일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뜰 앞의 잣나무라 하지 않았던가. 그게 뜰이든, 잣나무이든 무엇이 중요한가.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우고 그래 이렇게 가는 거야 하면서 가슴에서 따라올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쓰라면 쓰고, 그리라면 그리고, 심으라면 심고, 가치치라면 쳐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도제교육의 기본이다. 속성 교육의 밑바탕에는 賊機에 노출되어 모두 빼앗겨야 하는 전제가 앞서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은 큰 도적이 되어 학생의 지식과 지혜와 슬기와 망상과 집착을 모두 빼앗아내야 하고, 학생은 텅 비어 오로지 새로운 세계에서 줄탁동시로 설정한 교육 내용을 빨아 먹어야 한다. 빨고 쪼고 하여 하나의 세계로 나간 다음에 자기 자신의 슬기와 지식과 지혜와 망상과 집착을 다시 세워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