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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좌우가 깊은 산은 숲이 된다

by 나무에게 2013. 12. 24.

좌우가 깊은 산은 숲이 된다

-온형근


이틀동안 술이 있어서 지탱한다. 술은 무미건조한 나날을 위하여 존재한다. 술이 없었더라면 오늘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었다. 봐라 지금도 기침을 하지 않는가? 술을 마시고 이틀을 깊은 잠을 잤다. 석연치 않은 몇 가지 현상들을 위하여 잠을 청했다. 모든 게 조용하다. 이르게 나선 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한적하다. 이 길 지나면 산길로 접어든다. 도시의 길을 지나면 산길을 만날 수 있다. 산길이 있기에 도시의 길이 의미가 있다.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석연치 않은 현상을 위한 술이 있기 때문이다.

석연치 않은 현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석연치 않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가 된다. 내가 잠을 청한 것은 석연치 않은 현상을 위한 행위다. 일을 통하여 내게 남은 고통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과 관계에 의해 생긴 가슴앓이 종기다. 걸을 때마다 통증을 준다. 또 하나는 입술 언저리의 상처가 며칠 째 아물지 않고 있다. 입술 언저리는 수축과 이완 운동을 계속한다. 입술 중에서 가장 운동량이 많은 곳이다. 피곤함이란 이렇듯 상처를 덧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 같다.

눈 녹은 숲길이 신작로처럼 메말라 건조해 있다.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하얀 여인의 속살처럼 신작로의 황토가 반들거린다. 아,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흙의 돋보임, 사람에 의해 다져질수록 더욱 달빛에 어울리는 숲길이 벗겨진다. 모자를 벗는다. 모자 속에서 내 귀는 너무나 시끄럽다. 모자를 벗는 순간 우주가 고요해진다. 고요해진 우주를 느끼면서 나는 우주와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아직은 바람 소리가, 바람만이 나를 건드리고 있다.

숲은 우듬지를 포함하여 가느다란 겨울 가지들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달빛은 숲의 나무와 가지를 뚫고 숲길에 내리 붓는다. 숲길은 사람들에 의해 다져지고 나무 뿌리들이 길로 튀어나와 애처롭다. 뿌리의 기능을 확장하고 있다. 걷는 발바닥에 나무 뿌리가 계단턱이 되기도 한다. 언덕을 오르는 나를 돕는다. 나무가 그렇다.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세상을 노래한다. 세상을 가꾼다. 지극한 정성과 봉사의 원형이다. 숲 사이를 뚫고 달빛이 비스듬히 숲길을 내리 쫀다. 도시의 온갖 불빛들은 산 능선을 탄다. 숲 사이로 쏘며 들어와 숲의 바닥이 된다. 양쪽에서 산 능선을 비스듬히 타는 도시의 불빛은 싸구려 같다.

도시의 섬처럼 산 주위를 도시가 둘러싸고 있다. 이 산은 도시의 불빛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을 두어 군데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오른쪽으로 광교저수지가 나올 경우이다. 이때 오른쪽은 빛이 숨는다. 동시에 왼쪽 산 가까이에 만들어진 고층 아파트가 도시의 불빛을 막고 잠시 잠들고 있는 시간의 지점쯤에서 거의 왼쪽과 오른쪽이 완벽하게 도시의 불빛을 막아주는 첫 번째 지점이 된다. 지금 그 지점에 왔다. 숲이다. 도시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 숲은 완전한 숲이 된다. 숲은 거대한 산줄기를 이어가는 산맥이 된다. 잠시 오르고 잠시 내리막길을 거듭하면서 흙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산책이 된다.

숲의 소리가 들린다. 새벽 숲에는 영성이 있다. 도시의 섬처럼 떠 있는 숲도 새벽이면 영성이 있다. 약수터에서 아주 강한 불빛이 들어온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것은 약수터에 가기 위함이다. 이틀동안의 쉼은 나를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산 중반을 지나면 다시 산은 숲이 된다. 두 번째 완벽한 숲의 모양이 되는 지점인 곳이다. 여기저기 눈이 남아 있어 햇빛이 찾지 않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이면 온 몸에 맥이 풀리고 절정의 느낌을 지닐 수 있다. 넓은 정원이 있다면 이런 산책길을, 이런 난이도를 계획 설계하고 싶다. 오르고 내리고 평탄한 길을 거듭 반복하다가 어느 지점에 온 몸에 맥이 빠지면서 절정을 느낄 수 있는 길을 설계하고 싶다.

아침 숲을 찾아 산책을 하고 있다. 숲이 신비하지 않다면 매일 찾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의 관계도 신비에 의해서 좌우된다. 숲은 늘 같은 모습인데도 늘 새롭게 신비하다. 숲을 찾는 내 마음이 늘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오래도록 만나면 서로 닮아져 있다. 닮아간다는 것은 신비를 잃어간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서로의 닮아감이다. 닮아감과 신비는 이렇듯 이율배반적이다. 적절한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 닮아감과 신비로움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그 해답을 숲에서 찾는다. 늘 그 자리에 그 모습 바람이 불면 바람에 눈이 내리면 눈에 사람들이 밟으면 밟힘에 도시의 불빛이 숲 사이로 뚫고 들어오면 그대로.

나무가 굽으면 굽어 있음에, 기울면 기운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본다는 것은 닮아감과 신비로움을 지탱할 수 있는 커다란 화두다. 다시 멀리 도시의 불빛이 급경사를 타고 스멀거린다. 나무 사이를 뚫고 내 몸을 쪼고 있다. 지극히 산만한 나무들의 서 있음과 그 수묵의 선들. 굵고 가늘고 굽고 비틀거리는 나무들의 선을 도시의 불빛이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다. 차라리 어제처럼 안개가 은은하게 나무를 감싸주었더라면 보다 환상적이고 신비로웠을 것이다.

숲이 숲다운 산에 이르면 나무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 있음을 보게 된다. 새벽빛은 아주 엷은 칠하다 만 청동빛이다. 나무 둥치 사이로 아주 엷은 청동빛이 새벽빛으로 공기 중에 떠 있다. 숲은 그렇게 새벽빛을 머금고 있다가 새벽빛이 사라졌을 때 다시 일상적인 숲이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산도 좌우로 산이 깊어 도시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숲이 되는 것이다. 좌우가 깊다는 것은 전후가 깊다는 것과 매우 다르다. 내가 걷는 산 능선에서 좌우로 넉넉한 몸집을 한없이 펼쳐 놓고 있기 때문에 숲이 되는 것이다. 벗겨진 숲길 초입. 언덕, 오르막길, 내리막길, 달빛을 받은 성숙한 여인의 속살처럼 숲길이 다져지고 있다. 멀리 길을 밝히는 불빛을 따라 나의 발길은 고적한 풍경이 되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