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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안개가 그려내는 숲의 나무들은 어둡다

by 나무에게 2013. 12. 24.

안개가 그려내는 숲의 나무들은 어둡다

-온형근


문을 열고 밖을 나서자마자 새벽 안개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다. 사방이 젖어 있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도 네온사인 붉은 간판들도 안개에 젖어 있다. 흐무러져 있다. 그 안에 내가 점으로 박혀 있다. 혼자서 가로등이 길을 지키고 있다. 아스팔트 바닥은 젖어 있다. 뚜벅뚜벅 내 발길이 새벽을 나서고 있다. 새벽을 지나는 차 소리에 몸이 긴장된다. 가로등 불빛으로 안개는 모습을 드러낸다. 불빛이 없을 때 안개는 그저 캄캄한 어둠뿐일진대 가로등 불빛으로 안개는 살아 꿈틀대고 있다. 저 안개가 내게로 다가온다. 또 다시 차 소리가 소란스럽다.

내게로 다가온 안개는 부실한 내 몸을 휘감아 돈다. 그랬었다. 깎아지를 듯한 벼랑에 서 있을 때다. 그 아래 깊은 바다가, 그 아래 깊은 바다에서 철썩거리는 높은 파도가, 그 높은 파도에서 퉁겨 나오는 물보라가, 내 몸을 휘감은 적이 있었다. 오늘 그렇게 안개는 높은 절벽 벼랑 아래에 파도의 물보라처럼 내 몸을 휘감고 있다. 아찔한 순간이다. 내 몸은 그렇게 휘감기고 젖어 든다. 길을 건너기 위해 길에 나서 있다. 차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간다. 길을 건넌다. 어딘가 낯선 길을 걷는다. 밤새 건조했던 내 몸은 새벽 안개 자욱한 새벽길에서 다시 젖어 생동한다. 차 소리가 다시금 소란스럽게 지난다.

멀리서 모락모락 밥짓는 김처럼 새벽 안개가 피어오른다. 새벽 안개의 길을 가로지르며 나서고 있다. 늦은 출발이다. 몸 여기저기서 찌그럭거린다. 많은 시간들을 목 뒤와 허리를 망가뜨리면서 그렇게 일 속에 파묻혔다. 이제 얼마나 후련한가. 새벽 안개 길을 나서는 순간 모든 힘겨움이 안개처럼 스멀거리며 내 몸에서 빠져나가 안개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내 몸에서 빠져나간 저 안개는 다시 내 몸을 적실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내 깊은 곳에서 아주 깊게 똬리를 틀고 있는 정체 모를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일의 세계를 이미 알고 있다. 그 새로운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는 새벽 안개를 가르고 있다. 명멸하는 삶의 한 자락에 나 역시 명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손이 시리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연의 많은 인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벅차다고, 벅차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주어진 길이라고, 새벽 안개를 가르고 나서는 만큼, 새벽 안개는 또 다시 나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아무 것도 없는 청명한 새벽보다, 젖은 안개가 가득한 새벽이, 자주 있지는 않지만 어쩌다 있기에, 내 삶을 닮았기에, 기꺼이 기꺼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은 생각과 말과 글이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이 편안한 느낌 안개로 둘러싸고 있는 숲길 아래에서 그 위용에 내 몸이 작아지고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낀다.

급경사의 언덕길에 안개와 사람과 소나무 숲이 있다. 언덕길을 오르면서 안개에 둘러싸인 소나무 숲 사이로 지난다. 엄청난 떨림이고 웅장한 울림이다. 나무는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에게 나무 둥치 위로 가득 휘감고 맴도는 안개는 신비스럽다. 신비스럽고 고요하고 발걸음을 뗄 때마다 드러나는 나무의 둥치가 생경해 보인다. 안개는 감췄다 드러냈다 보여줬다 감췄다 하면서 끝없이 신비로워져 있다. 내가 안개가 되어 안개로 흐르고 있다. 조금씩 보인다는 것, 인기척, 까만 물체가 꿈틀댄다는 것, 안개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이와 같아, 까만 것이 더 명료하고, 흰 것이 자신을 더 멀리 드러내며 세상을 벗기는 것, 다시, 헛기침 그리고 인기척.

안개는 흰색 눈에 흩어진다. 안개는 검정 나무 둥치에 둘러싸여 나무를 드러내게 한다. 하얀 눈은 안개를 벗기고, 안개를 보이지 않게 감추고, 까만 나무 둥치가 안개를 드러나게 한다. 길이 좁아진다. 멀리 떨어져 있던 소나무들이 점점 내 앞에서 달라붙는다. 소나무들이 달라붙은 그 길 가운데를 나는 지나고 있다. 내 몸이 죄어지는 느낌이다. 나도 곧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 그렇게 좁혀진 길을 가로막고 있다. 도처에 가로등 불빛, 켜져 있는 불빛은 안개를 넓게 확산시킨다. 멀리 불빛들은 나무들을 감싸면서, 숲이 까만 성이 될 수 있도록, 숲의 나무들은 안개를 위해서 수직으로 선 정물이 된다. 낯설지 않다. 산 아래에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들이 산 능선을 타고 오르면서 안개와 만난다.

안개는 가로등 불빛을 맞이하고, 가로등 불빛과 안개는 하나가 되어, 산 능선을 타고 산을 오르고 있고, 산 정상에서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나를, 나와 정면으로 만나면 안개와 불빛이 하나된 물결이 되어, 흐름으로 도도히 산 능선을 오르고 있다. 산을 내려오기가 민망하다. 숲의 나무들은 굽혀짐, 수직, 휘어짐, 굵고 가는 까만 붓으로 휘갈긴 채, 서 있다. 안개는 숲을 그려내는 화가다. 안개가 그려내는 숲은 고적하다. 안개가 그려내는 숲의 나무들은 어둡다. 안개 밖에서 안개는 모든 것을 감추고, 감싸고 있는 안개가 퍼져 있는 것을 한 구역으로 그림을 그린다. 안개가 둘러싸 있지 않은 곳은 그림이 되지 않는다. 안개가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은 안개의 그림이 된다. 저 쓸쓸하고 우울한 잿빛 안개의 드러냄, 그리고 그 속의 어둡고 짙은 숲들이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안개가 스멀거리며 피어오른다. 나는 다시 안개를 따라 안개와 함께 산언덕으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