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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99-천양희, 물음

by 나무에게 2013. 12. 23.

물음 / 천양희 

 

 

세 번이나 이혼한 마거릿 미드에게
기자들이 왜 또 이혼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가 되물었다
" 당신들은 그것만 기억하나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

 

시 쓰는 어려움을 말한 루이스에게
독자들이 왜 하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가 되물었다
" 왜 당신들은 그것만 묻나
내가 몇 번이나 간절히 무지개가 있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


시집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 ' 11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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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꿈을 가지는 것을 미련이라고 한다. 미련을 가지고 있어서 미련하다는 평가도 있나 보다. 꿈을 지니고 사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반성과 새로운 일상이 내재되어 있다. 우직하다. 매일을 몇 안되는 사람들과 반복되는 일상으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은 단조로워 보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상이라는 것은 자주 일상을 죽여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일상에 매몰되며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상을 제공한다. 어제 한 말을 잊고 오늘 또 그 비슷한 말을 하며 주거니 받거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뭐에 대한 이해인지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말이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관대해지는 면은 있다. 지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술좌석이 그렇다. 흥겨움보다는 반복되는 일상의 근무라 그렇다. 일상 그 이전과 이후, 그래서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던 사실과 무지개 빛 세상을 꿈꾸는 애틋함과 파릇함을 묻지 않는다. 이미 화석화되어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전히 애틋함과 파릇함은 생명력을 지녔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일상에서 피어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애틋함이고, 꿈에 대한 파릇함이다. 그러니 그렇게 술좌석처럼 묻지 마라. 그냥 물어 보아라. 살아가는 일이 술맛을 돋구기 위하여 슬쩍 이런 저런 질문을 퍼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일은 사랑과 꿈의 근원적인 물음이었을 때 근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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