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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주체적으로 살기_3. 주체적으로 살기

by 나무에게 2013. 12. 24.

주체적으로 살기_3. 주체적으로 살기 / 온형근



3. 주체적으로 살기

모든 과정을 놓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려서부터 배워 온 반공 일변도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내 주체적인 판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가. 흥분과 격정을 못 이기며 살아 온 젊음이 너무 안타깝다. 그 시간에 보다 성숙되고 아름다운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비뚤게 표현하느라 또 얼마나 빙 돌며 살았는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을 넓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한 개인의 성향과 성정을 뛰어 넘어 온 세상의 가치기준과 만난다. 한 나라에서 전체 세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으면 한 나라의 실정을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마생태농장에서 내내 느낀 것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곧 생태농장의 연원이라는 것이다. 농사짓는 법이 언제부터 따로 있었겠는가 싶다. 안다는 것이 정말 앎인가 싶다. 지금까지 쌓아 온 농사 지식을 가지고 거기서 출발하여야 한다. 지금부터 출발하여도 척박한 땅에서 소출이 있을 수 없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등등의 말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문자로 말하는 게 아니다. 그의 농사짓는 문자는 불립문자다. 문자와 언어로 표현되는 그 어떤 것도 그의 주체적인 삶에 근접할 수 없다. 오히려 주고받는 질문과 답변 속에 내가 더 곤혹스러움을 느낀 것은 왜일까. 나는 비슷하게 그의 삶이 이러할 것이라고 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세상 저 쪽에 있다. 이미 큰 강을 여러 번 건넌 사람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만남은 숱한 관계를 설정하게 하였다. 극과 극의 세상,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절망과 희망,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생태공동체마을이다. 한마디로 삶 자체의 주체적 속성에 의해 살겠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하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미 미국조차 넘어선 영적인 삶으로 돌아선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먹고 싸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행위에서 주체적이지 않다. 예속되어 있다. 그것도 미국에 의해 철저하게 책략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누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하는 것, 또 누가 어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 것, 또 누가 더 나은 꿈의 실현을 위하여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숱한 한국의 행위들이 미국의 손바닥에 삼장법사다. 숨통이 터진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미국의 한 주가 아니라 미국의 어떤 국립공원의 집단시설지구 정도밖에 되지 않다고 말이다. 국가가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국민은 어떤 깨달음을 지녀야 하는가. 법성포에서 유명한 일번지 식당에 들리면서 생각했다. 왜 이 집만 이렇게 몰리는가 말이다. 주변에 이 집만큼 잘 하는 곳이 많다. 예전에 들렸던 명가어찬도 독특하고 잘 한다. 그런데도 모두 일번지로 몰린다. 왜냐? 집단대중으로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며 살아가게끔 훈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지몽매를 깨는 일은 계몽시대에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시대, 오늘과 내일도 계몽시대인 것이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신념이 요구된다. 화전을 다시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