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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주체적으로 살기_4. 제 몸 공부의 생태적 상상력-정(情)

by 나무에게 2013. 12. 24.

주체적으로 살기_4. 제 몸 공부의 생태적 상상력-정(情) / 온형근



4. 제 몸 공부의 생태적 상상력-정(情)

몸에서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에서 몸이 움직인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균형이다. 기울고 처지고 삐끗하고 접질린다. 종잡을 수 없다. 제멋대로 굴린다. 돌봐주지 않은 것은 치기다. 자신 없으면서도 자신 있어 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제멋대로 굴릴 수 있다. 원력 또는 원기가 있다. 이제 다 사용하였다.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다. 공부가 필요하다. 내 몸을 알아야 소중함의 가치를 알게 된다. 어디서부터 공부를 해야 할지, 기댈 곳을 찾는다. 화려한 미사여구라도 좋다. 내가 끌려 들어갈 수만 있다면 따른다. 미혹이라도 괜찮다. 나를 혹하게만 해주면 만족한다. 내 안에 있는 불신의 흔적을 한꺼번에 거두어 갈 수만 있다면 행복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다. 아니 바위, 돌, 모래, 흙 등의 무정물까지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생명력이라 함은 <그냥 있음>에서 한 단계 진화한 움직임이 포함된다. 몸도 마음도 <있음>이다. 따로 있기도 하고 함께 있기도 하는 <있음>이다.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움직인다. 동태적인 상태에 있다. 그래서 생명의 원천인 생명력을 지녔다. 답사 내내 바라보는 대상들은 <있음>의 세계에 있다. 있음의 세계에서 우리는 동태적 가치를 찾아낸다. 생명력을 바라본다. 회산 백련지의 생명력은? 고산동 마을의 생명력은? 대마생태농장의 생명력은? 불갑사의 생명력은? 그리고 다랑쉬의 생명력은? 무엇이 채워져 있고 무엇이 비워져 있는가. 따로 노는 것은 무엇이고, 혼자 노는 것은 무엇이며 함께 어우러지는 것은 무엇인가.

몸이 말을 한다. 마음이 밭을 간다. 몸이 유정(有情)이고 마음이 무정(無情)이다. 둘 다 아우르면 정(情)이 된다. 정이 머무는 곳이 몸이어야 한다. 생태적 모든 가치에 정이 머물러야 하는 이유다. 몸과 마음은 정을 통하여 깊어지고 융숭해진다. 생태적인 모든 여정에는 생명력이 머물러야 한다. 몸과 마음에 생명력이 머물러야 하고, 생태적인 모든 흐름에 정이 스며야 하는 이유다. 내 몸을 공부하는 것은 곧 생명을 공부하는 것이고, 생명을 공부하는 것이 생태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공부는 이미 우주가 되어 있는 몸의 공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정(情)이다. 정(情)은 모든 것의 활력이다. 그와 내가 정을 통하여 그도 아닌 나도 아닌 상태가 되고, 이곳과 저곳이 정을 통하여 차안(此岸)과 피안(彼岸)도 아닌 생태적 아우름의 공간을 이룬다.

나는 그 여정에서 허덕인다. 중국한의사는 불법체류자다. 불법체류자에게 나를 의탁한다. 소개해준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운명적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혹하려한다. 정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살림>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전혀 한 번도 듣거나 기사를 대한 적이 없다. 그냥 물살에 이끌려 다가왔다. 아주 오래 전에 소백산 비로사에 머문 적이 있다. 옻나무연구회와 함께 머물렀다. 그 모임 잘 되다가 어떤 한 놈이 사업적으로 다른 짓을 하는 바람에 좋은 뜻과 달리 깨졌다. 짧았지만 오래 기억되는 모임이다. 좋은 친구들도 아직 남아 있다. 새벽에 세수하러 개울로 나가다 두꺼비와 구렁이를 만났다. 두꺼비가 구렁이를 찾아다녔나 보다. 알을 낳기 위해 구렁이를 찾아다닌 것이다.

구렁이와 두꺼비의 대치상태다. 구렁이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 왜 대치하고 있으면서 마법에 걸렸는지, 최면에 걸렸는지 바짝 얼어 꼼짝 못하고 있다. 어찌 그리 경색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이 생태적 유전인자가 아니겠는가 싶다. 세수하고 돌아오는데 두꺼비가 구렁이의 목에 걸려 있었다. 이제 곧 넘어가서 구렁이 뱃속에서 알을 낳고 두꺼비 새끼를 키울 참이다. 큰스님이 말했다. 잡아다 소주에 담아 놓으라고. <지금 그 약이 필요한 사람이 아프기 시작했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 후에도 나는 큰스님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지금 생각하면 생태적 사고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 몸이 망가졌다. 어떤 생태적 사고를 해야 하나. 몸 공부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