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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진주팔경을 찾아서

by 나무에게 2013. 12. 24.

2003년 답사 보고서


오랜만에 나선 답사길이다. 벌써 4년째 접어드는 조경문화답사의 올해 주제는 '팔경'의 경관적 해석이다. 이제 조경에서 조경문화까지 발전되고 있는 셈이다. 팔경은 문학에서 많이 다룬 학문 영역이다. 한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팔경 연구는 곧 '한시'와 '옛그림'에 대한 통찰을 동시에 이루게 하는 원천을 지니고 있다. 팔경이라는 말 자체에 경관에 대한 이미지가 스며있다. 조경은 경관을 만드는 일이라고 얼른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팔경은 경관을 만드는 일에서 경관을 경관 자체로 볼 수 있는 의미의 세계로 진일보하게 나가는 통로이다.

많은 생각들과 시간들이 격랑을 이루며 지나갔다. 그렇게 3월을 맞이하였고, 언제나처럼 답사를 나서는 길에는 주저함이 없다. 진주팔경이 그 첫번째 답사길이다. 적어 놓지 않으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새로 만든 고속도로를 내처 달리다 보면 서서히 답사의 현장으로 이끌리게 된다. 지성적인 감성을 지각이라고 한다. 막상 나서면 이성과 지성이 모여 지각의 현상학으로 몰린다. 몸도 마음도 오관까지도 답사의 품으로 안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서보다는 먼저 생각나는 풍경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일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울긋불긋 엎치락 뒤치락 생활하던 나를 끄집어 낸 곳은 육십령재였다. 그것은 단순히 최근에 통독하였던 시인 허만하의 시집과 산문집의 덕분이다. 허만하 시인의 저서 모두를 구입하여 허한 마음과 풍경에 다가가는 마음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느꼈던 근래의 여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고 가장 아꼈던 시가 나를 깨웠다.

겨울나무의 혼은 오히려 건조하다. 오리나무 흑갈색 둥치에 시린 귀를 붙이면 물관 속을 흐르는 은빛 물소리가 엷게 깔리는 눈송이 같은 순도로 희박하게 들린다. 얼음장 밑을 흐르는 여울물보다 세찬 그 흐름은 맑은 삼투압으로 내 몸 안으로 더운 피처럼 서서히 번진다.

겨울나무 가지는 바람과 빛살의 미묘한 변화를 먼저 느낀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새로운 눈부심이 되는 가지 끝은 봄의 입김을 기다리는 흰 눈에 촉촉이 젖은 예민한 성감대 같다.
억센 바위를 깨고 자라는 여린 근모에서 썰렁한 하늘에 갈색의 안개 같이 서리어 있는 잔가지 끝까지 중력과 싸우는 싱싱한 힘처럼 거꾸로 흐르는 물소리의 설렘.

물은 낮은 쪽으로 흐르는 비굴이 아니다. 물은 언제나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거꾸로 서서 흐르는 물은 가혹한 의지(意志)만으로 한 그루 오리나무처럼 비탈에 서 있다.

먼발치 아래 인적 없는 들길이 눈바람에 묻히고 있다. 아득히 저무는 들녘 끝에 눈부신 외로움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미루나무 밑 캄캄한 토사층을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는 목마름의 청렬한 뒤척임을 본다.
낙타빛 혼의 몸살을 안으로 달래고 있는 겨울숲 삭막한 목소리는 자욱한 눈발에 가리어 들리지 않았다.
(허만하 시인의 '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 전문)

허만하 시인이 보았던 육십령재를 육십령터널로 지났다. 대체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새로 난 고속도로는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내몬다. 무주 덕유산 자락을 지났나 싶은 순간, 함양의 아름다운 마을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내 육십령재의 경관이 안개를 피워오르며 산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내 그곳은 지나간 흔적 모를 장소가 되고 만다. <물은 낮은 쪽으로 흐르는 비굴이 아니다. 물은 언제나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고 한 허만하 시인의 시를 느낄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무도 빛살도 물도, 그 어느 것도 지각되지 않는 움직임이다.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치는 경관도 경관일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서 내심 고속도로를 원망한다. 이렇게 온 국토를 이리 저리 칼질하여 난자시킨다면 이제는 출발지와 도착지만 남고 경유지가 없게 된다. 부석사를 찾을 때 구비구비 돌아 도착하는 것이 고생스러웠다고 생각한 엊그제의 숨결도 마찬가지다. 너무 쉽게 부석사를 찾을 수 있다는 매력 하나만으로 출발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서툴고 씁쓸해야만 했던 것이 결국 길에서의 사유였음을 돌아와서야 알게 된다.

감성은 누구나 지닌다. 감성의 체험은 조금 달라진다. 이성 역시 누구나 지녔지만 이성의 사유에 와서는 조금씩 달라지고 만다. 누구에게나 있는 나날의 이성은 지성으로 가는 출발지이다. 지성이 되었을 때 감성과 지성은 조금씩 교통한다. 그래서 지성적인 감성이 되고, 지성적인 감성은 지각이 된다. 여기서 흘리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면 체험이다. 체험은 상상과 이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몸이 개재되어 동적인 활동을 지녔을 때 만나게 된다.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육십령터널'이라는 글자 하나만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서운함이 답사내내 길게 따라다닌다.

그렇게 진주에 도착하여 진주 팔경을 답사하기 시작하였다. 답사 전에 다랑쉬 홈페이지에 올려진 진주팔경(晉州 八景)에 사경을 더하여 진주 12경을 중심으로 다듬어 보기로 한다. 첫번째가 촉석임강이다.
촉석 임강(矗石臨江)은 촉석루 그림자가 남강에 잠기고 흰 구름 두둥실 떠서 물새 노니는 멋을 말한다. 이미 진주성 안으로 들어온 상태에서 촉석임강은 남강 건너 대밭쯤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촉석루에서 남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강 건너에서 그것도 촉석루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남강에 비친 촉석루 그림자를 본다는 것이다. 아득하기만 하다. 휴일의 사람들은 촉석루로 몰려 있지 강 건너에서 이곳을 쳐다보는 일은 없다. 대체 사람의 고귀한 정신이라는 것의 끝은 어디까지일지를 생각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늘 어느 한 곳을 둔탁한 고무망치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다.

두번째의 경관은 의암낙화이다. 의암 낙화(義巖落花)는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 의암 위에 춘삼월 꽃잎이 날려 와서 흰눈처럼 너울거리는 경치를 말한다. 바위가 층을 이루며 의암으로 기울어진 길을 걸으면서 낙화를 떠올려보나 계절은 꽃을 안겨주지 않는다. 몇 번을 오르고 내리면서 내가 찾은 것은 '참느릅나무'였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깎아지를 듯한 절벽으로 누워 자라는 참느릅나무 가지에 아직 남아 있는 열매를 보고 있었다. 느릅나무 열매를 유전이라고 한다. 옛 돈인 동전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느릅나무는 5월쯤 열매가 맺히지만, 참느릅나무는 가을에 열매가 맺힌다. 두번째 경관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팔경 자체가 시간과 계절과 장소를 모두 포괄하고 있기에 한꺼번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는 내가 의암낙화에 어울리게끔 사유해야만 했다. 코끼리 코라도 만져보겠다는 생각이다. 의암에 올라 논개를 느껴보고, 참느릅나무 열매에서 낙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세번째는 망미 고성(望美古城)이다. 망미루(영남포정사)에서 내려다본 밥짓는 연기를 말한다. 예전에 여주에 살았을 때도 여주팔경에 이와같이 고기잡이 배가 들어오고 강 건네 집에서 밥짓는 연기가 나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경관을 바라보는 지각을 떠나 있다. 바라봄 뿐이 아니라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상상을 자극하는 것이다. 점점 난처한 팔경 공부가 되고 있다. 이제 어디서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서 망연해지고 만다.

네번째는 비봉 청람(飛鳳靑嵐)이다. 비봉산에서 나물 캐는 여인의 모습을 말한다. 남강 건넛산을 바라보는데 산을 절반쯤 가린 아파트가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억지로 나물 캐는 여인을 떠올린다. 내 심상에는 박수근의 그림들이 스쳐 지난다. 아기 업은 여인이기도 하고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이기도 하다. 저고리와 바지 중간의 빈 자리가 허전해 보이는 여인이기도 한 것이다. 팔경 공부를 포기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린다. 속으로 웃고 만다. 뭔가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한다.

다섯번째가 호국 효종(護國曉鐘)이다. 호국사의 첫 종소리, 그 종소리를 신선의 경지라 하는 것이다. 진주성을 돌고 돌아 호국사를 찾고 사진을 찍으면서 커다란 종이 절 오른편에 놓여 있음을 바라본다. 사천왕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고 높은 계단을 통해 사찰은 완성되어 있다. 종소리 대신 풍경소리가 진주성의 바람을 실어나르고 있다.

여섯번째는 수정 반조(水晶返照)이다. 수정봉의 산마루의 저녁 노을을 말한다. 저녁 노을은 진양호를 기대하면서 감춘다. 진주성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진주팔경을 건네야 할 것 같았다. 호국사를 돌면서 내려다 보는 남강에는 FRP 오리 형상의 배들이 둥둥 떠다닌다. 문화에 대하여 대단한 자존심을 가진 진주사람들이 어찌 저런 인공적인 그림을 남강에 띄웠는지 의아스럽다. 상혼과 문화는 늘 이렇게 엇돈다. 누가 먼저랄 게 없다. 자본주의는 서로를 구속하고 서로를 돕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

일곱번째가 풍천 표아(楓川漂娥)로 강변 아낙네들의 빨래방망이 소리와 낚싯배의 한가로운 경관을 말한다. 그리고 여덟번째는 청평 총죽(菁坪叢竹)로 배건너 대밭에 모여든 까마귀의 울음소리이다. 풍천표아와 청평총죽 모두 소리와 관련있다. 그 소리는 소리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한가로운 경관과 어울려지는 소리이다. 점입가경이다. 그러면서 왜 팔경에 이렇게 아낙네들이 많이 등장하는지 싶다. 얼마전 탈고한 내 연작시 <화전>에도 아낙이 등장한다. 특별한 의미보다는 사람이 있어 삶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화전이 이상향일 수 없지만, 그 속에도 건강한 원초적 삶이 있다는 생각을 했나보다.

아홉번째는 진소연화(晋沼蓮花)이다. 연꽃만발한 진영못(없어진 북장대 아래의 연못)을 말한다. 여기에는 '개천예술제'쯤 열리게 되는 투우장이 있었다. 연꽃과 투우가 이미지로 상충되면서 상설투우장의 원을 따라 울긋불긋 깃발이 꽂혀 있음이 그나마 북장대에서의 바라봄을 의미있게 한다. 열번째가 선학노송(仙鶴老松)으로 선학산의 천년 노송을 말한다. 열한번째는 남산행주(南山行舟)로 남산쪽으로 물을차고 돌진하는 전함같은 진주성의 모습이다. 선학노송과 남산행주도 경관체험에서 비껴나 있다.

열두번째가 끝으로 아산토월(牙山吐月)이라는 멋진 표현이다. 동쪽 멀리 우뚝 솟은 월아산이 달을 머금고 보름달을 토해내는 장관이다. 토해내는 달이라.....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바라봄이 이에 이르면 바라보는 대상도 아름다움의 극치이겠지만, 바라보는 사람은 가슴 속에 얼마나 아름다운 미학을 지녔을까를 짐작해본다. 이어지는 통영팔경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겠다는 내심을 지니면서 목이 마르다. 남강이 보이는 맥주집에서 달 대신 맥주를 토해냈다. 진주팔경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맥주에 섞여 내 피부 곳곳에 흡수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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