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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2004년의 외출

by 나무에게 2013. 12. 24.

1. 기력이 떨어졌다.

기력이 떨어졌다. 오늘부터는 정원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 등산화를 꺼내 놓고 작업화로 사용할 수 있는지 점검한다. 교내를 샅샅이 돌아본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힘을 쓰는 일이다. 도움을 받거나 기댈 만한 것은 없다고 여긴다. 순전히 내 힘으로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는지 모르겠다. 어디 아픈 사람처럼 차분하다. 아무 욕심도 내지 못하게끔 힘이 없다. 바보처럼 물을 끓인다. 힘들면 차를 마셨다. 또 기댄다. 차를 마시면 달라지는 게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러나 여전히 힘이 하나도 없다. 말할 힘조차 없다. 이런 날 누가 날 툭 건드리거나 괴롭히면 쓰러질 것 같다. 오늘은 제발 나를 있는 듯 없는 듯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진지하고 고요하게 진행해야 한다. 답사 후 이렇게 힘이 빠져 있기는 처음이다. 아주 알찬 답사였다. 골프장에 공문을 보내 답사를 돕도록 하였고, 토지공사에 공문을 보내 토지문학공원의 식재평면도와 시설물배치도를 사전에 제공받았다. 마침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원주시청 관리인이 나와 우연찮게 박경리 선생이 사시던 집을 열고 방방을 걸어다니며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나는 괜히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선생이 쓰시던 여행가방에는 PKL이라는 이니셜이 붙어 있었다. 주방과 주방 옆 테이블에 앉아 보았다. 사용하던 가스레인지와 냉장고도 보았다. 단단한 목재로 만든 책꽂이도 열심히 사진 찍었다. 그리고 덩그런 책꽂이 한 편에 누가 진열했는지 토지 전집을 찍었다. 열쇠를 가지고 와 공개해 준 관리인의 배려가 고마웠다. 이제는 다랑쉬 명함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와 긍정이 어울린다. 왜 이리 힘이 없는지 모르겠다. 단전에서 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맥이 없다.

차를 마셔야겠다. 우선 차를 마셔보는 것이다.

2. 구절초가 피어 있는 풍경

구절초가 피어 있다. 단연 계절을 품기에 으뜸이다. 군계일학이 다름 아니다. 주변을 내려다보는 품새 또한 압권이다. 꽃밭에서는 봄부터 작위적일 만큼 제 흥에 겨운 꽃들이 모양, 색깔, 향기, 품격을 내 뿜으며 피어갔다. 더러 고임을 받는 꽃들이 제 터전을 확장하며 자리를 잡고 으스댄다. 꽃밭 곳곳 조금씩 이동되고 변화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시선의 작용이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며 시샘과 이동을 거듭하던 꽃밭에서 늦게 구절초가 피었다.

어쩌다 밀려 제키만큼 가는 띠를 이루며 한 줄로 길게 피어 있다. 활짝 피어 순은의 빛나는 정취다. 구절초가 순은의 모습으로 더 벗길 것 없이 피어 있을 때는 바로 쳐다볼 수 없다. 나로 하여금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게 한다. 바로 이때쯤 구절초가 가장 환상적이다. 아름다움이란 나를 부끄럽게 하면서 조신하게 한다. 내내 사라지지 않는 광경이 되어 풍경으로 익는다. 풍경 하나쯤 지니고 살아가는 일 대수일까 싶으면서도 진하게 뒤집어 쓴 향기다.

거침없이 자신의 나신을 햇살에게 내 보이는 구절초의 결연한 의지 앞에 눈먼다. 내 앞에 온통 구절초다. 높은 하늘, 반짝거리며 빛나는 나뭇잎, 들판과 산 모두에 구절초는 살아 있다. 더 이상 부끄러워 할 틈조차 쉽사리 내 주지 않겠다는 것인 양, 그랬다. 구절초와 함께 했던 답사였다.

3. 알타리무 익어 가는 들판

황금빛 그대로인 벼들이 차창에 반짝인다. 들판에는 알타리무 직립하여 견고하다. 그 작은 밭에는 시퍼런 파가 살찐 기립으로 지상에 풍경을 덧칠한다. 들깨가 베어져 가지런히 눕혀 있고 아직 호박 덩굴이 섬섬옥수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이런 시월 초의 풍경은 들판보다 생활에 더 가깝다. 신림은 내게 남다르다. 제천을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날 때쯤이면 도착한 것처럼 두근대던 곳이다. 다 왔을까 싶어 한번쯤 바깥으로 눈길을 주면 그곳은 어김없이 신림이었다. 대학생활과 군대생활, 다시 대학생활, 그리고 직장생활 한동안까지 이곳은 내 눈맵시를 꽤나 시리게 했다.

성황림을 들리고 근처 소로길에서 시간을 보내던 다랑쉬 팀과 만난 것은 신림 삼거리다. 굳이 찾아 들어가지 않고 그곳에서 기다렸다. 가겟집 앞에서 괜히 담배도 사보고, 맥주 캔도 사보고 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그 방식 그대로다. 금방 온다는 전갈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신다. 잠시 빗방울이 내렸다. 어, 하는 사이에 그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한번도 가보지 못한 신림에서 영월 가는 길을 향한다. 나는 제천에서 영월을 가 본적은 있어도 신림에서 직접 영월을 가본 적은 없다. 예전에 국회의원선거 때, 영월의 유력 의원이 강원도 길로 다니게 하겠다는 선거공약 그대로였다.

영월 책 박물관은 초등학교 폐교자리에 만들어졌다. 예전 초등학교 교과서와 방학숙제 책 등을 보는 일은 꽤나 즐겁다. 보는 순간 불길처럼 확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 좋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특정 학년의 교과서나 방학숙제 책을 보면 그 학년의 담임 선생님이 자동으로 불쑥 떠오르는 체험은 남달랐다. 내가 다니던 이전의 책도 보았다. 초등학생의 관점으로 내 이전의 책을 본 게 아니라, 다 성장한 지금의 관점으로 내 이전의 책들을 보는 것은 논리적이고 꽤나 잘난 척이다. 해방 직후, 한국 전쟁, 5.16 이후, 등등 내가 아는 역사와 그 시절의 초등학교 교과서는 다분히 객관적이어서 낯설었다.

4. 그리다 만 붉은 노을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다는 선암에 들렸다. 어쩌면 선암을 먼저 들리고 영월 책 박물관을 들렸는지 모른다.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게끔 전망대를 잘 만들어 놓았다. 구비치는 물길에 의해 한반도 지형이 만들어졌다. 자연과 사람의 인지가 만난 곳이다. 사람의 인지는 한없이 풍요로워지고, 사람의 직관은 더없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닌지.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답사라는 이름으로 찾아와 확인하고 느껴야 하는지. 대체 무엇을 얼마나 더 느끼고 알고, 행하여야 하는 것인지. 염선생이 가져온 동동주를 풀었다. 밥풀이 동동 뜨는 그야말로 동동주였다.

동동주를 마시면서 속으로 마음이 편했다. 뭔가를 준비하면서 누군가가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그것을 준비한다는 것은 감동적이다. 이건 순전히 내가 즐겨 먹는 막걸리 때문이다. 나는 다랑쉬 회원 모두에게 막걸리 예찬과 막걸리 마시는 실천이, 언행일치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야 답사 중 만나기 귀한 동동주를 마실 수 있을까. 동동주를 마시면서 언뜻 동동주 달 타령이 떠올랐고, 그 하늘이 노을지는 것을 보았다. 너무 부끄러운 듯 그리다 만 붉은 노을을 쳐다보며 나도 미안해한다.

그 붉은 노을 주위로 붉음으로 움츠려드는 가을 파란 하늘이 섬찟 대며 머뭇거린다. 저 노을 앞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아직 밝은 데 여명처럼 노을이 은은하여 강렬하다. 그래서 온 몸이 저리고 끔찍하다. 그 붉은 색 그대로 용소막 성당을 찾았다. 내가 도착하였을 때는, 은은한 성당의 불빛과 가로등이 느티나무를 그려내고 있고, 해진 직후의 풍경을 조금씩 도우며 스러지는 풍경을 매달고 있었다. 해진 직후의 풍경을 일삼아 보고 있다. 아주 맛진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알려지지 않고 아는 사람만 조용히 다녔으면 좋을 식당이다.

5. 나는 첫 날만 써야겠다.

첫 날만 쓰자. 그런데 이게 답사 첫 날에 해당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고 나서의 풍경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랑쉬가 처음 결의를 다진 곳이 원주 치악산 휴양림이다. 그곳에서 나와 정명렬, 안행준 이렇게 셋이 뜬구름 잡는 결의를 한 것이다. 지금도 뜬구름 잡고 있기는 매 한지다. 잠을 못 참는 내게 답사 후 숙소에서의 술 마시는 행위는 성공률이 희박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닭을 사서 백숙을 해야 한다는 총무의 의지와 달리 나는 새벽에 국물을 마셨다. 남들 깰까봐 조심하면서 새벽을 연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 중에 하나가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를 따라 걷는 일이다. 그것도 새벽길을 나서고 싶어한다. 치악산 휴양림의 황토방은 숙소와 산책로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새벽 갈증으로 일어나 엊저녁 맛보지 못한 백숙 국물을 파 송송 넣어 끓여 마시고 산책로에 들었다. 시멘트 콘크리트 포장이 곧 끝나고 신작로가 펼쳐진다. 깊게 심호흡을 한다. 숨쉬기에 정성을 들이기 위해 하늘을 보는데 삭으로 가는 그믐달과 샛별이 빛을 내고 있다. 싸리나무들은 벌써 노랗게 든 단풍을 자랑한다. 여기서 혹은 저기서 수상스러운 소리들이 있는 새벽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채 단풍이 익지 않는 먼 산들이 ‘보들보들’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촉감으로 닿는다. ‘살찐 포동포동함’이, ‘왕만두 살결’ 같았다. 그리고 다시 긴 숨을 몰아쉬면서 사유에 이른다. 돌아와 12시간을 잤음에도 다음 날 기력이 모두 떨어진 것처럼 느꼈던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혹은 내가 늘 좋아하던 장렬하게 꽃이 지는 능소화나 무궁화가 아니었던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고꾸라져 무의미한 쓰러짐에 너무 익숙해진 생활을 아닌가를. 이것도 나를 이루는 풍경임이 분명하다.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