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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고졸미, 그리고 수졸당과 양졸정

by 나무에게 2013. 12. 24.
고졸미, 그리고 수졸당과 양졸당 / 온형근
 
 
옥수서원은 추사체의 고졸미를 느끼게 한다.

양동마을에서도 수졸당과 양졸정을 살폈다.

 

졸이라는 말이 다가서기가 어려운 말이다. 쉽게 졸이라는 말을 쓰기에 민망할 정도로, 무슨 대가나 되어야 졸할 졸拙자를 사용할 수 있나 보다. 예전에도 고졸이라는 말만 나오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뜻으로는 옛스럽고 졸하다. 또는 옛스럽고 서툴다. 옛날의 서툰 맛...뭐 이 정도인데, 너무 자주 인용되는 것이다.

 

나만 이 말의 순전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고졸미 근처에서 놀아 보았어야 고졸미의 완벽한 맛을 알 수 있는데, 허구헌 날 막걸리나 들이 마시고 그 속에서 예민한 감성이나 숙성시키고 있었으니, 맨 정신에서 오로지 하나의 깊은 맛을 우려내야 하는 고졸미를 알게 되었겠는가. 그래도 언젠가는 가까이 다가서겠지 하면서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한국의 아름다움에 이 고졸미가 빠질 수 없다. 마치 여자들에게 백치미가 있다든가 하는 말도 아직도 풀기 어려운 과제이듯이. 알 듯 모를 듯 고졸미를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말도 안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이 수도 없이 많은데 하필이면 우리나라는 고졸미니, 백치미는 하는 것이냐, 라면서 제법 객관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하수인 바에야, 대가들의 그 아름다움을 보는 눈에 근접할 수 있었겠는가. 인위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에 가까이 가는 길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거꾸로 답이 있었다. 가장 일상적인 생활에서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
 
꾸미지 않은 여자에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꾸민 모든 것은 잠깐 사이 식상해진다. 이것이 진리다. 잠깐 사이 식상해지는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게 현대의 살아있음이다. 그러니 쉽게 달아 오르고, 식고 하는 것이다. 좋았다가 금방 식상해지는 것이다. 이번 답사가 그런 느낌을 주었다. 답사하는 사람들은 옛사람들 그대로 인데, 어찌 답사의 흥이 가라앉아 안타깝기만 했다. 혹시 답사의 식상함이 아닐까. 그렇다고 이벤트를 할 수는 없다. 인위적인 어떤 요소가 답사에 끼어 들 수는 없다. 그래도 그게 최선의 답사 행태라는 생각으로,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답사 모습이라고 단언한다. 그 이상의 어떤 요구도 발현될 수 없다. 
 
색을 바르는 일로 답사를 마칠 수는 없는 법이다. 바르는 것으로 마치는 게 아니다. 스미고, 번지고, 우려 내고 있을 수 있는 모든 것들로 담아 내야 하는 것이 답사다. 고졸을 이야기 하다가 대졸을 이야기 하고 있다. 고졸 수준으로 스밈, 번짐, 우림 등을 바라보는 것이 고졸미를 이해하는 첩경이 아닐까 싶다. 있는 그대로, 처음 본 느낌으로, 그리고 그것을 자신 있게 툭 내던지듯이 표현할 수 있으면 한다. 좋은 말로 화색을 바꾸어 뭔가 말이 되게 하려니까 답사 보고서도 안 나오고(이 부분은 정말 심각하게 다랑쉬의 이름으로 반성해야 한다.) 늘 다음 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밀리는 일을 덜어 내는 방법은 없을까? 이러다가는 답사문화동인 모임이 아니라, 여행 동호회로 바뀌어야 한다.

古拙美, 守拙堂, 養拙亭 이런 단어들이 따라 다녔다. 서툴고 졸한 분위기와 영혼을 지켜낸다. 아니면 서툴고 졸한 모든 것들을 길러낸다. 이런 식으로 졸할 拙자가 사용되고 있다. 얼마나 저 말이 깊으면 떡 하니 택호(당호)로, 정자 이름으로 버젓이 사용하는 것일까. 그런데 실제로 양동마을에서 수졸당의 위치와 양졸정의 위치는 가장 전망이 근사한 곳이었다. 가정이나 향단이 후세에 들어 찾아 드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름이 나 있지만, 사실 양졸정과 수졸당이 오히려 중심이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근사하였다. 양동마을을 찾은 사람들은(나도 그랬다.) 긴 시간 걷지 않는다. 깊이 있는 답사를 하지 않고 그냥 관광처럼 향단과 관가정을 돌고 만다. 그 일대가 그렇게 후대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월성 손씨네의 관가정은 농사지을 가자에서 보이듯 농사짓는 모습을 정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이 기막히다. 향단은 회재 이언적의 아흔아홉칸 건물이다. 독특한 공간 구성과 좌향을 가졌다. 모두 문필봉인 앞산의 기를 받는 형국이다.

 

옥산서원이라는 추사체에서 고졸미의 극치를 본다. 마치 붓을 잡은 지 얼마 안되는 소년의 필체처럼 서툴다. 필체 자체가 고졸한 것이다. 이렇게 서툰 글씨, 초등학교 때 흔히 보던 그런 글씨를 옥산서원 정면에 걸었다. 예전에 흐르는 물길이 끊겼다. 내가 본 것들은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오래도록 기억했던 것들의 확인인 셈이다. 새로운 것을 또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옥산서원에서는 뭔가 윤기가 빠져 나가고 빈집의 분위기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폐가의 분위기가 엿보였다. 그래서 얼른 나왔다. 사진도 몇 장 찍지 않았다. 계류로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세심대를 보러 간 것이다. 그런데 세심대 역시 글씨가 뭉그러져 있다.

 

예전에 보았던 글씨를 떠올리면서 애써 세심대의 글씨를 찍는다.

 


사진으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2년 6월 9일 답사에 찍은 사진은 글씨가 명료하다. 4-5년 사이에 이 글씨가 위에서처럼 많이 헤진 것이다. 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의 문제인지. 자연의 헤짐인지, 참으로 세월 앞에서 사람 앞에서 많은 게 쉽지 않다.

세심과 징심, 이런 말이 어울리는 계류이다. 반석이 되는 바위가 계류를 오래도록 튼실하게 한다. 깎여 나가지 않으니 좋고, 둘러 앉아 있을 수 있어서 좋다. 폭포를 이루는 바위로 둘러싸인 비밀의 물길이 있어서 신비롭다. 그 위로 널판지를 하나 두고 오고 간다. 여름이면 저 물길에 들어가 더위를 식힐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상으로 바라보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 위로 끝없이 계류의 시원이 이어지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동료들과 다시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저 계류의 상류를 향하여 마냥 걷고 싶다. 저 위로 계속 걸어가면 다음 답사지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독락당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입밖에 내지 않는다. 차를 타고 독락당으로 옮기고 만다.

 
독락당에 오니 농촌전통테마마을이라는 푯말을 보게 된다.

 

세심마을이라고 되어 있다. 독락당 앞 계류에 관어대, 징심대, 탁영대 등이 보인다. 결국 정신의 정원이다. 유교의 정원이고 주자학의 실천 도장인 셈이다. 제도와 체계를 허물어 낼 수 없다. 탈북자 자녀들이 다니는 안성 한겨레중고등학교에 간 적이 있다. 그 학생들 역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게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실현하는 것이라 한다. 제도와 체계는 정말 한 순간에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문화인 것이다.  관어-관람, 세심-징심, 탁영-탁사 이 3가지를 기억하는 것으로 답사의 의의는 충분하다. 계정을 보았고, 살창이 있는 담장을 보았다. 독락당의 공간 구성이 태극의 디자인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하고 둘러보려 했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생각과 달리 세심마을이라는 테마마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농촌진흥청에서 육성하고 있는 사업이다. 농촌전통테마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아름마을 등과 같은 녹색관광마을을 육성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녹색관광을 통하여 농촌지역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도시민에게 휴양과 휴식, 학습과 여가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것이다. 2002년부터 시작되었다. 농촌전통테마마을 내방객의 평가와 요구사항을 분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 : 조록환 외 4명, 전통테마마을 육성 연구,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제 15권 2호, 2004년

 

위의 자료에서처럼 중요도의 순위는 마을 농특산물의 질, 가격, 마을 자연 경관, 농특산물의 종류, 내방객과 주민과의 대화, 주변관광지와 연계 등의 순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체험활동에 대한 요구도는 이색건강체험, 보양체험, 자연채취체험, 자연탐방, 농경체험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 다시 조사한다면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멀뚱멀뚱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바라보고 만다.
세심마을이 그랬다. 벌써 2007년이니까 세심마을이라는 전통테마마을의 흥이 식은 것이다. 마을 곳곳에 있는 농장의 표지판이 너무 예뻐 사진을 찍는다. 세심마을이라는 테마는 사라졌어도, 생산하는 농특산물은 그대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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