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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백제의 부소산성_판축토성에 대한 상념

by 나무에게 2013. 12. 24.
백제 문화, 그리고 부여를 다녀왔다. 한국전통문화학교가 있는 곳이다. 백제문화 재현 단지에서 오랫동안 백제를 느꼈다. 다녀와서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때 느낀 것들의 알맹이가 빠져나갔다. 그런데 무엇인가 남은 것이 있을까? 라고 치근댔다. 그래서 나온 게 판축기법이다.
사비백제 시대의 부여에 있는 부소산성에서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가진 판축토성의 구조를 알게 된다. 판축토성(版築土城)은 성벽을 축조할 때 판축용 틀을 만들어 그 안에 흙을 채워 넣고 나무나 돌로 만든 달고로 다져서 축조한 토성이다. 중국과 일본 등 동양 3국 모두 분포하고 있다. 물론 토성의 축조 방법은 다양하다. 가령 방금 말한 판축법을 비롯하여 성토법, 삭토법, 보축법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유난히 판축법으로 토성을 축조하고 있다.

판축토성 기법이 기억에 유난히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공사구간별로 할당을 정해 토성을 만들었다는 부분에서 미소를 지은 것이다. 서울의 서울성이나 수원의 화성은 돌로 쌓은 성이지만, 역시 부분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할당을 받은 구간에 대하여 성을 쌓았다. 서울성은 그러한 내용을 성을 싼 돌에서 글씨를 새겨두었다. 화성은 돌 값을 지불하면서 성을 쌓았으니 서울성과 조금 다른 내용을 가졌다.
하필이면 부소산성의 토성을 거닐면서 [공공근로자]들의 근무 자세에 대해 듣게 되었는지. 그들 역시 할당을 주고, 책임량을 마치면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자세가 달라진다고 했다. 아니면 한도 끝도 없이 일이 늘어진다고 한다. 다만 너무 일찍 끝나 남은 시간을 어찌 해결해야할지 감독으로서 눈치 볼 일 또한 보통 난감한 게 아니겠다.
백제는 700여 년의 역사를 지닌다. 그중 웅진(공주)과 부여 시대는 200 년이 못된다. 500여 년을 한성 백제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3세기로 거슬러간다. 판축토성 기법이 백제에 한정지어진 토성 축조 방식이 아니라 말했다. 중국과 고구려를 비롯하여 일본까지 이 기법이 사용된다. 다만 3세기-4세기 근처의 한성 백제 시기의 한강 유역에 축조된 판축토성과 5-7세기대의 사비 백제시기의 판촉토성은 판축 구조물과 축조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판축성벽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목주와 판목, 횡장목, 종장목 등의 구조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자세히 살펴본다.
 
목주(木主)는 영정주(永定柱)로서 판축부 경계면에 세워 토사 밀림을 방지하게 하는 판목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비계목의 역할도 한다. 따라서 목주는 판축을 위해 성벽심으로 작용한 직접적인 기능과 사다리의 역할을 한 비계목의 기능으로 나누어진다. 우리가 답사한 부소산성의 목주는 이 두가지 역할을 겸한 것이라고 한다.
판목(板木)은 판축공사시 판축토가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목주나 횡장목에 고정되는 가구목의 일종으로 일반적으로 두꺼운 판자가 아닌 단면 오목형의 판목이 사용되었다. 판목을 고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각의 목주마다 세로의 홈을 길게 파고 판목을 양 목주와 홈 사이에 끼워 넣어 고정시키는 방법이다.  이 경우 목주의 홈은 판목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도록 너비와 깊이를 조절하여야 한다. 홈의 깊이가 너무 낮으면 판목이 빠져 나오거나 큰 힘을 지탱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전에 목주의 크기와 판목의 두께를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이 방법은 최소한 두 목주 사이를 다른 부재를 사용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하여야 하며 일정 두께의 판축공사가 끝나면 위로 끌어올려 가면서 판축을 계속할 수 있게 한다. 지속적인 공사용으로 어울린다고 보면 된다.

또 하나는 목주를 횡단면상 반원이 되도록 세로로 1/2 정도씩 켜서 두 목주 사이에 판목을 끼워 넣어 고정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목주 사이에 판목을 세로로 끼운 후 끈 등을 사용하여 판목과 목주가 고정되도록 묶어주고 판축토루의 내외벽간에는 긴 끈으로 묶어 연결하게 된다. 이때 묵주의 맨 밑부분은 주공에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비효율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쉽게 묶거나 풀을 수 있고 필요할 때 판축토 내부에 끈이 묻힐 경우에도 절단하면 쉽게 판목을 분리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판목의 높이는 부소산성에서 30센티미터, 두께는 망이산성에서 6센티미터로 조사되었다.
횡장목(橫長木)은 판축공사시 판축토의 압력으로 인해 목주와 판목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횡으로 가로지르는 기능을 하는 가구목으로 주로 각재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버팀기능과 함께 목주와 판목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였던 보조목으로 생각하면 된다.
횡장목은 일정 높이 이상에서만 사용되었는데 부소산성에서는 판축토 맨 밑바닥으로부터 130-140센티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노출되었고 그 위로는 30-45센티미터 간격으로 상하로 배치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목주와 나란히 배치된 경우도 있었으나 목주와 목주 중간에도 위치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횡장목의 연결방법은 꺽쇠나 끈, 또는 홈을 파서 끼우는 방법 등이 있다. 풍납토성에서는 횡장목에 구멍을 뚫어 목주에 끼워넣어 결구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종장목(縱長木)은 판축공사시 성벽 진행방향을 따라 세운 목주와 목주 사이를 종으로 가로지르며 판목을 지지하는 기능을 하는 가구목이다. 따라서 주 기능은 목주와 함께 판목을 서로 연결하여 지지하는 버팀기능에 있다.
이 종장목은 횡장목과 함께 판축공사가 완료된 후에도 판축토내에 묻혀 희생목으로 남아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판축토성 축조의 흙일에 나는 유난히 관심이 앞서 있었다. 풍납토성을 예를 들면 그렇다. 사다리꼴의 중심토루를 축조한 다음 그 내방면으로 덧붙여 판축하여 견고하게 쌓는 형식의 토성이다.
흙을 운반한 인원을 계산한다. 길이가 3.5킬로미터, 밑부분 폭이 43미터, 높이가 11미터로 토량만 139만 1,250제곱미터이다. 이를 톤으로 환산하면 222만 6천 톤이다. 이를 1.5톤 트럭으로 운반한다면 13만 9,125대의 분량이다. 지게로 날랐을 경우 운반거리 100미터라고 해도 운반인원은 62만 6,240명에 달한다.
맞나? 한 번 계산해 보라.
그런데 이 토량은 판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의 규모로 계산된 것이다. 따라서 판축기법에 의한 압축이 1/3정도라고 한다면 운반인원은 위 인원에 3배를 곱한 180만 1,720명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성벽을 축조한 인원은 얼마나 들었을까?
하루에 한 사람이 2척을 축조한다고 한다. 1척을 평균 30센티미터로 하여 토량을 계산하면 441.5장(丈)이 된다. 한 사람의 공력이 하루 2척(尺)의 흙을 축조한다면 모두 221명이 동원된다. 따라서 연인원은 257만 8,186명이라는 계산이된다.
결국 흙을 운반하고 성벽을 축조한 인원을 더한 전체 풍납토성의 판축토성 축성 연인원은 445만 9,906명이 된다.
이때의 인구를 대략 5만명으로 본다면, 5만명 전체가 공역에 참여하였을 경우 90일이 걸리는 대역사임을 알게 된다.
풍납토성, 한성백제의 국운을 건 대역사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부소산성은 여러 세월을 지나면서 서서히 만들어졌다. 다양한 판축기법이 공존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왕조시대의 삶을 생각한다.
모든 게 왕조의 재산이다.
보살핌 안에서 자아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정한 율법에 따라 삶을 꾸려나간다.
어쩌면 지금도 왕조시대와 다를 바 없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삶을 이루는 것 같지만,
조직과 단체의 율법에서 정한 세계에서 다투고 있다.
너와 내가 있고,
이와 저가 있고,
여기와 저기가 있다.
정해 놓은 사람이 혼자 웃고 있는데도 그렇게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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