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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청명, 낙산에서 노닐어 보다

by 나무에게 2013. 12. 24.

청명, 낙산에서 노닐어 보다 / 온형근



지금은 광주 광역시라 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 소쇄원이다. 광주 사람들의 자동차 문화로 나들이 코스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조광조의 제자 소쇄 양산보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건립한 별서다. 한국의 별서정원은 단언하자면 여름을 위하여 존재한다. 소쇄원은 광풍각과 제월당을 중심으로, 보이는 경관과 보이지 않는 사색이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광풍제월이란 말에서 광풍각과 제월당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가진 셈이다. 광풍제월은 중국 송사(宋史)에 나오는 말이다. 보통 가슴 속에 맑은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한다.



양산보가 꿈꾸던 가슴 속에 맑은 인품을 지닌 사람은 누구였을까? 양산보였을까. 아니면 자기의 꿈과 젊음의 이상을 투사하였던 스승 조광조였을까. 북송(北宋)의 유명한 유학자로 애련설을 지은 주돈이가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모가 있으며 올바른 정치를 하였다고 한다. 주돈이를 일컬어 송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가슴속이 맑아서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개인 날의 달과 같구나." 라고 했다. 곧 광풍제월(光風霽月, 빛 광. 바람 풍. 갤 제. 달 월)의 출처라 할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의 별서정원을 모두 답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골격을 둘러 보았다. 단언코 여름을 위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크다. 이렇게 소쇄원을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정자 문화를 여러 차례 다녀온 것과 달리 서울은 딱히 관점을 가지고 돌아다닌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여차저차 낙산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것도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도시에 가득할 때 찾았다. 어쩌면 일삼아 서울 낙산을 오를 계획으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는 과정에서 익고 터진 셈이다. 큰 딸이 낙산 근처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구체적인 윤곽이 잡힌다. 낙산은 혜화동 대학로 뒤편에 위치한다. 서울시가 '낙산공원'으로 재단장하였다. 그러면서 내세운 것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몽마르트 언덕처럼 명소로 꾸미겠다는 것이다. 하기야 몽마르트도 해발 129m 언덕으로 평평한 지형이 대부분인 파리에서 파리시내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낙산은 해발 125m이고 이곳에 오르면 남산타워,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 등 서울의 동서남북이 한눈에 보인다.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대학로의 이점을 이용하여 낙산도 몽마르트 못지않은 명소로 태어날 수야 있겠다. 하지만 그 언덕길을 오르내릴 정도로 이 나라 대학생들의 발길은 한가하지 못하다. 결국 나처럼 중년의 끝자락에서 들락거리는 한가한 명소(?)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다. 낙산에는 폐위된 단종비 송씨가 생계를 위해 비단에 자주색 물을 들여 팔던 샘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자지동천(紫芝洞泉)'을 비롯,청나라 볼모로 잡혀간 효종이 홍덕이라는 나인이 담가 바치던 김치 맛을 잊지 못해 본국으로 온 뒤 밭을 만들어 이름붙인 ‘홍덕이네 밭'등이 있다. 자지동천은 볼 수 없었지만 홍덕이네 밭은 둘러보았다. 혼자 부쳐먹기에 알맞은 규모다.
낙산 정상부근에는 오래된 집들이 즐비하다. 가끔 TV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오는 낙산에 있는 서울 성곽의 모습들이다. 이곳이 조선 초의 청백리 유관 선생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비가 오면 방안에서 우산을 받쳐 비를 피했다는 ‘비우당'이 있다. 오늘은 비 그친 날이다. 오전 내내 비가 왔다. 내친김에 비를 맞을 각오였지만, 거짓말처럼 맑다. 청명이 다름 아니었다. 가슴 속이 한참동안 맑아진다. 바람 역시 알맞게 얼굴을 스치며 재롱한다. 북악과 인왕이 훤하다. 왼쪽으로 남산이 깨끗하다. 서울의 풍경이 이처럼 훤한 적이 있었던가. 과연 경관은 찰나다. 찰나인 경관을 보기 위하여 발품을 판다.

하나의 경관을 보기 위하여 주변에 더 많은 풍경들을 품는다. 하나의 경관은 주변의 풍경들에게 마음을 의지한다. 낙산의 풍경은 청명이라는 경관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성곽의 돌에는 세월이 녹아 있다. 단장된 공원 산책로 사면에는 낭아초가 선명한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다. 홍덕이네 밭에는 얼갈이배추, 상추, 고추, 가지 등이 심겨져 홍덕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낙산정에서는 멀리 청명이라는 이름의 경관이 사방을 들쑤시고 있다. 내 안의 풍경도 한껏 맑음으로 들떠 있다. 낙산은 풍경과 상관 없이 오래된 친구처럼 살갑다. 내려오는 길에 버스 종점에서 조금 걸으면 낙산월드마트 옆 좁은 골목길에 낙산 냉면을 먹는다. 다음에는 덜 매운 것으로 시켜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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