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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하이패스 남자

by 나무에게 2013. 12. 23.

하이패스 남자 / 온형근



빨간 신호봉을 그저 아래 위로 흔들 뿐
눌러 쓴 사각 정모에 가려 먼산을 보는지
한번 열린 동공의 망막에 흐린날이 뿌려져
그 남자, 세상에 나와 사주팔자에 없는
애꿎은 손만 내리고 올라갈 뿐
바람과 비와 햇빛 앞에 고스란히 그 남자
하이패스로 흐르는 불빛에 눈부신 채 떨고 있어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도 따라 할 뿐
바랠만큼 덮여 있는 더께처럼 주저앉음
상처 하나 없이 발돋움한 채 표정은 처음처럼
고요하여 옷깃 여미는 통행소리 흔들리는 미소
하이패스 남자를 따라 무표정해지고 만다.
어느새 같은 일만 되풀이하고 있는 내 모습이
매일 같이 지나며 보는 하이패스 남자로
또 보고 멀어져 가곤 하는데 겨울이 오면
따뜻한 외투라도 걸쳐 두어야 할 것을
내가 거기 서 있는데, 아내는 날 찾을 수 있을까.


월간 스토리문학, 2007.11(통권41호), 109쪽 [하이패스 남자] 전문


아침, 저녁 출퇴근이 다인 생활을 두어 달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내게 술마시자 통화를 시도한 사람은 없다. 상가집을 같이 가자고 전화한 모범생은 있었다. 매일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아니면 강의를 한다. 내 컴퓨터 앞에는 이런 글이 붙여놓았다.

[아파보니
마음과 생활습관
근처더군요.

평상심으로,
절도있게,
운기運氣하세요.

온형근 올림]

그러고 보니 너무 좋았다. 아주 근사하게 써서 액자에 넣어 크게 바라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읽을 수록 의미가 깊다. 마음도 어려운 놈이고, 생활습관은 더더욱 복잡한 놈이다. 어떤 상황, 어떤 언행에서는 반드시 그 습관이란 놈이 턱 하니 버티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이 마음인데, 마음이라는 놈도 한 동안 떠내 보냈던 터라 쉽게 친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평상심이 중요하다. 늘 같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이 도를 취함과 다를 바가 없다. 거기다가 절도까지 가미하면 이는 엄청난 깨달음이다. 얼마나 아팠으면 이 평범한 진리에 몸을 떨고 있을까. 하나 더 보태지 않았는가. 운기라고 말이다. 운기. 기운을 운행하는 것, 보통 운기조식 하지 않던가. 그냥 운기만으로도 호흡이 조절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1. 마음, 2. 생활습관, 3. 평상심, 4. 절도, 5. 운기 이 다섯가지가 어느새 내 근처에서 저절로 외워지고 실천되는 큰 덕목이 되고 있다.

하이패스 남자를 느끼면서 5덕을 실행하고 있다. 그러니 내 삶이 꽤나 팍팍해진 셈이다. 아니면 만물이 극치에 이르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이, 팍팍해진 지금이 본래의 자리일 수 있다. 어떤 극점에 도달한 것만은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뭐 별 것 있을까 싶다. 빨간 신호봉을 아래 위로 흔들며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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