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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한지와 붓털의 깊이

by 나무에게 2013. 12. 23.

한지와 붓털의 깊이

아침에는 '해 뜨면 달빛도 그림자도 흔적도 없어진다.'라고 썼다. 오늘 글씨는 다른 곳에서 깨달음이 일었다. 처음에 붓털의 길이가 긴 것으로 멋지게 쓰려고 했으나 한지가 연습지 중에서 최고 하질인 것에다 썼더니 먹물이 그대로 흘러 넘쳐 글씨가 뭉그러지고 만다. 조금 붓털의 깊이가 다른 것, 그러면서 세필 쪽으로 바꾸면서 썼다.  그러나 보니 질 좋지 않은 한지에서도 글의 맛이 새겨진다. 거꾸로 좋은 한지에서는 반대의 효과가 나타난다. 흡수력이 좋은 종이에는 붓털이 길어야 먹물 머금은 양이 풍부해져 깊이 있는 글씨가 써진다. 대체 좋은 한지는 그 먹물의 머금는 양을 측량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붓털이 가늘고 짧은 세필류에 어울리는 종이가 따로 있다. 붓털이 길고 풍요로운 붓에 어울리는 종이 또한 따로 있다. 이 두 가지가 조화 있게 만나지 못하면 흉칙하다. 글씨는 뭉그러지고 종이는 제 혼자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종이가 흡수력을 지니지 않았는데 붓털의 풍요로움이 들락거린다고 해서 글자가 종이에 온전히 새겨지는 게 아니다. 질 좋은 종이라 흡수력이 뛰어난데 세필류의 붓에 먹을 묻혀 글자를 새긴다면 그 또한 너른 바다에 피래미 한 마리 지나간 흔적이고 말 것이다. 알맞은 붓털과 한지가 만나야 한다. 거기에는 붓털과 한지의 좋고 나쁨이 따로 있지 않다. 다만 서로의 몸가짐과 마음지님이 서로에게 잘 어울리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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