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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04.소나무 숲에 춤추는 바람 길 - 영축산 통도사

by 나무에게 2014. 1. 19.



004.소나무 숲에 춤추는 바람 길 - 영축산 통도사 / 온형근



누가 심었을까 소나무 숲

통도사 입구는 두 방향으로 틀어진다. 내를 건너서 돌아가는 길과 내를 건너지 않고 곧장 오르는 방법이다. 처음이라 내를 건너 돌아 들어갔지만 누가 심었을까 소나무 숲이 길 양쪽 가득이다. 심은 게 분명하다. 가꾸어지지는 않았다. 간벌間伐이 필요한 시점에 간벌이 되지 않았다. 조직적으로 숲을 가꾸는 일이 지속되었더라면 상당히 매력있는 숲으로 기품을 갖췄을텐데, 조금 아쉽다. 하지만 소나무 삼라만상이라 부를 수 있겠다. 소나무의 다양한 굵기와 자람의 방향이 마치 사바세계의 속인들처럼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봐줄만하다. 모든 것이 기품있을 수는 없는 법, 그 기품을 돋워주는 수면 아래에서의 부단한 세계가 음지를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통도천 입구의 다리를 건너지 않고 새로 조성된 마사토 포장 솔밭길로 접어들면 생각은 바뀐다. 수백년 된 소나무들이 딛고 선 토질의 성질에 맞춰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하늘로 뻗었다. 구갑龜甲이면 1백년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소나무들은 구갑의 두께에 이미 잘 수행된 덕德을 갖추고 있다. 이름하여 무풍한송舞風寒松 솔밭길이란다.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흔들며 춤추니 시원한 바람일 것이다. 


달빛과 산빛

뜨락 가득 달빛은 연기 없는 등불이요
자리 드는 산빛은 청치 않은 손님일세.
솔바람 가락은 악보 밖을 연주하니
보배로이 여길 뿐 남에겐 못 전하리.

滿庭月色無烟燭 入座山光不速賓
만정월색무연촉 입좌산광불속빈
更有松絃彈譜外 只堪珍重未傳人
갱유송현탄보외 지감진중미전인
-최항(崔沆, ?-1024), 〈절구(絶句)〉

정민 교수의 7언절구 삼백수에 실린 최항의 한시이다. 여기서는 소나무 가지가 들려주는 가락을 송현松絃이라고 했다. 악보로 옮길 수 없는 가락이기에 탄보외彈譜外라고 했다. 그래서 남에게 전할 수가 없고 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전인未傳人이다. 그러니 통도천을 향하여 뻗은 수백년 소나무들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직접 들어야 제맛이다. 


아랫 동네에서 윗 동네까지

영축총림 통도사라고 불릴 만하다. 말로만 통도사가 큰 절이라 들었지 이렇게 규모가 클지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지니고 있는 통도사에 대한 이미지가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사천왕문으로 시작하여 사찰 공간을 익히는데 돌아 나와서야 공간이 세 공간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공간마다 중심 법당이 반듯하다. 부지런히 윗 동네 법당까지 한달음에 찾는 사람들은 이 고장 사람들이거나 익숙한 신도들이다. 사전에 공간에 대한 지식 없이 찾은 나같은 사람에게 이곳은 한참을 돌아야 공양간이라도 찾을 수 있겠다. 쓸모 있는 공간과 전각들로 겨울 풍경임에도 꽉 찬 듯 기운이 충만하다. 마당과 지붕 높이의 비례가 좋고, 오래된 단청과 목재의 빛바램, 그리고 그 안을 서먹하지 않게 왕래하는 사람들로 사찰이 잘 짜여져 인심 좋은 마을 같다. 이런 마을이라면 아이 낳고 골목마다 뛰노는 소리 왁자하고 편안한 의식주와 얼굴 좋은 대화가 절로 익어갈 것이다.


새벽 예불 산책하는 바위

다시 새벽 예불차 걷는 산책은 또 다른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무풍한송 마사토 포장길이 산자락에 걸쳐 있는 바위들로 인해 마냥 볼거리 투성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 자손대대로 복되게 하라고 기원했을까. 저렇게 새긴 각자는 또한 누구일까. 누군가 제자를 길러내며 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름을 새겨주고 조선 팔도 전답을 모두 샀어도 남을 금력이었을까. 아니면 돈이 생기면 그날로 다 쓰고 다음에 또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작업을 했을까. 글씨체도 같은 체로 이루어진 것을 보니 사람이 빈틈없이 고지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큰 바위, 높은 바위, 절벽 바위, 기어가는 바위, 앉아 있는 바위, 누운 바위, 금방 뛰쳐나갈 기세의 바위마다에 세상의 이름 석자가 어찌 저리 곱고 깊게 새겨졌을까. 저 바위에 새긴 이름들이 영축산 통도사를 지켜 내는 혼령이겠다. 저 혼령들이 무풍한송 솔밭길을 더욱 춤추게 하겠다. 몇 백년 후 속인들이 걷게 될 이 길에 솔향 그윽한 걸음걸이 가득하겠다. 바위에 새겨진 사람의 이름만 거두어도 새벽 예불은 정성스럽고 겸허해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