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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05. 마음이 편해지는 길 - 강릉 능가사

by 나무에게 2014. 1. 20.



005. 마음이 편해지는 길 - 강릉 능가사 / 온형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법당

야트막한 언덕 뒷밭으로 민가 담장을 끼고 올라서니 솔개가 움집을 짓고 살만한 아늑한 공간이 열린다. 삼면의 급한 경사를 지닌 산들이 법당을 에워싸고 있다. 이런 공간에서의 첫 느낌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1학년에게 느낄 수 있는 단정함을 넘어선 단아함이다. 그랬다. 능가사는 단아했다.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고 이번에는 좌선이 아닌 입선으로 서서 명상에 몰입했다. 내가 정호가 되어 서 있었다. 내가 정호를 찾는 게 아니라 정호가 정호를 찾았다. 법당 문고리를 채우던 Y자형 새총 같은 막대기가 반들반들 반짝거리며 빛을 낸다. 나무 재질에서 매끄러운 촉감이 손바닥을 통하여 가슴으로 전해진다. 이내 이 공간에 서 있는 모든 객체가 부드러워진다. 나도 입매무새를 바로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한다. 법당 앞 잔디는 겨울 흙의 들었다 놨다를 견디고 있고, 단 아래 마당은 잘 다듬은 모래사장처럼 잔돌들이 이리저리 모난 부분을 부딪치면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모든 예술의 완성은 사람됨이다.

고암갤러리는 법관 스님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이다. 생전 처음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이내 첫번째 절에서 만류하여 일배로 마쳤지만, 내 생애 스님과 맞닥뜨려 절을 주고 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불법 근처에서 떠돌기만 했다. 스님 어깨 위에 걸린 만공스님의 글씨 가산소거迦山小居가 아주 잘 어울려 있다. 사실 맨 처음 내 눈이 머문 곳은 다유구덕茶有九德이었다. 내용 전에 글씨와 그림이 그리고 여백이나 색감 모두가 앉으면서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보니 대둔사 응송스님의 글씨다. 정말 예스럽다. 뇌와 귀, 눈과 소화, 술과 갈증, 피로와 잠, 추위와 더위에 차가 함께 한다. 한 잔의 차에서 한 조각의 마음이 나오고, 한 조각 마음은 또한 한 잔의 차 안에 담겼다는 말 그대로 스님의 예술론은 차 한 잔에서 시작되고 이어졌다. 글씨도 그림도, 시도, 소설도, 음악도, 연극, 영화 등 이 세상에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의 지향점은 사람됨이라 했다. 사람됨을 잃고서 예술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단정이 소박하지만 강한 울림으로 닿는다. 같은 생각이다.


욕심이 뼛조각처럼 희어진다는 것은

모자라고 바보스럽다는 말이다. 뭔가 되고자 함이 욕이라면 그 욕을 어찌 없앨 수 있을까. 살면서 하고자 함과 되고자 함, 그렇게 해야 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는 지금도 그러운 욕을 끌어올려 한 해를 준비하고 한 해의 시작을 다듬고, 그래서 다시 자신을 연마하고 채찍질하는 게 아닌가. 어쩌라는 말일까. 욕심을 어찌 잠재울까. 조금 모자라고 어딘가 완성되지 않은 비워짐 같은 안목에 기댈 일이다. 안목 밖에 다른 게 없다. 세상과 인생과 예술을 바라보는 안목을 조금씩 찬찬히 모자라지고 부족해지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세상살이로 치환하는 게다. 조금씩 찬찬히 나간다. 금방 되지 않겠지만 나아간다. 볼 줄 알면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사리라는 게 뭔가. 모든 게 비워지고 더깨가 닦여져 마지막에 남는 희디 흰 뼛조각 아니겠는가. 마음을 희게 하여 내 안의 뼛조각만 능가사 법당 문고리 채움 나무처럼 반짝이고 싶다. 모자라고 바보스러운 내가 얼마나 더 모자라고 바보스러워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능가사를 다녀오고 나서 생긴 병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