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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10. 한 사람의 호기로운 기운이 서려 있네 - 치악산 구룡사

by 나무에게 2014. 2. 22.



010. 한 사람의 호기로운 기운이 서려 있네 - 치악산 구룡사 / 온형근



입구에 들면 한 사람이 떠 오른다.

다른 생각 없이 매표 후 황장금표黃腸禁標로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바위에 글씨로 새긴 벌채를 금지하는 표지이다. 황장목은 나무 중심 부분이 누런 색깔로 나무질이 단단한 질 좋은 소나무를 말한다. 오랜만에 왔으니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며 계곡쪽 데크로 진입한다. 무심코 바라 본 교량의 용 조각이 낯설지 않아 편했으나 잠시 다리를 지나 왼쪽 바위와 雨水節에 흐르는 계곡의 맑고 그윽함이 심상치 않았다. 아뿔싸, 한 사람의 호기로운 기운이 평석에 머물고 있다. 퀭한 머리칼을 아무렇게 흩뜨리고 물에 발을 담근 채 몇 박스의 소주를 찬물에 담그고 둘러 앉은 청춘들. 아파도 너무 아파 아픈 줄 모르고, 아파서 통하지 않고, 통하지 않아 꽉 막힌 차고 명징한 그 속에 소주와 계곡물이 서로 섞혀 치오르게 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맞은편 암벽과 눈녹은 맑은 물, 그리고 둘러앉은 평석들의 세트가 통째로. 사람의 형체만 외곽선으로 물음표를 찍고 있다. 뭉클한 가슴에 유명을 달리한 한 사람의 호기가 오롯하다. 


계곡 옆으로 난 길이 황홀하다.

설레이는 여린 마음이 허공에 떠돈다. 삼삼오오 등산객이 호젓하게 이른 시간을 재촉하는 틈에 끼여 공간을 향유한다. 걷는다는 것이 도착할 곳과 돌아올 것을 상정하는 일이라면 내가 걷고 있는 건 뭘까. 딱히 걷는다고 할 수 없는 여유로운 머무름이다. 공간을 걷는 게 아니다. 시간 속에 거처를 정하는 것이다. 시간을 온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기에 오히려 시간에게 구속되지 않는다. 발끝에서부터 짜릿한 행복감이 전해진다. 곧고 굵은 백년 수령의 금강송들이 길로 쏟아진다. 마치 처음 구룡사를 찾은 듯 낯설어서 두리번댄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섞여 있다. 새로 만들어 낯설었나 싶었다가 다른 곳에서 본 듯한 풍경이어 익숙해지곤 한다. 풍경은 이렇듯 서로 섞여서 분별을 방해한다. 분별의 무의미야말로 걷는 것의 본질이겠다.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과 구룡사로 이어지는 길에서 구룡사 전각들은 위용으로 똘똘 뭉쳐 있다. 약간 언덕을 이루는 전각 아래는 돌로 쌓은 성벽들로 견고하다. 그 앞을 이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실루엣처럼 걷는 위치와 햇빛에 출렁인다. 밤에는 달빛에 어슬렁거릴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몰입에 든다.

원통전을 지나 은행나무에 탄성을 내고 사천왕문, 보광루, 대웅전으로 옮겼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왔기에 생경함을 씻어내고자 보광루 입구에서 치악산 비로봉을 바라보았다. 보광루 입구에서 바라보는 치악의 풍경에 마음이 씻어진다. 루에 앉아 종일 바라보아도 지치지 않을 것이다. 법당에는 나 혼자였다. 내가 커져 꽉 차는 듯한 느낌이다. 꽉 차 있는 사이로 몇 사람의 기척들이 오고 간다. 큰 숨을 나누고 나오니 다시 치악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다가선다. 무작정 이끌리는 대로 나선다. 새로 지어진 전각 뒤로 나서니 산자락에서 겨우 찰피나무를 만난다. 저 찰피나무 무척 자랐다. 주변 잣나무까지 하늘을 찌른다. 한참 후 내가 찾았던 나무는 그 아래턱에서 다시 만난다. 주변을 살필 새도 없이 쭈그러 앉아 세상에 둘도 없는 몰입에 든다. 눈 녹아가는 경계선을 따라 찰피나무 열매를 줍는다. 화장굴뚝 주변에도 많고 산자락 물길 건너에도 많다. 내가 처음 찍어 둔 찰피나무였다. 작은 문을 밀고 사방 팔방 열매만 보인다. 덩달아 세상의 시끄러움과 번잡함조차 스며들지 않는다. 몰입이라는 게 본디 주변을 물리치고 깜빡 세상을 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상을 잠깐씩 떠나는 행위들이 모여 부처에 이르나보다. 어느새 저만큼 떠나버린 나그네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