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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12. 모든 것이 사방팔방 돌아가는 기운 - 칠현산 칠장사

by 나무에게 2014. 3. 10.



012. 모든 것이 사방팔방 돌아가는 기운 - 칠현산 칠장사 / 온형근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으로 예불에 낀다.

얼떨결에 대웅전에서 예불을 함께 했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장엄한 스케일이었는데, 안에 들어가 예불하면서 느껴오는 것은 꽉 짜여 있으면서 친근감 충만이다. 뭘까? 불상과 스님과 내가 한 공간이다. 아아, 법당이 한 칸 정도는 더 뒤로 물러나 앉았어야 했다. 이거 다르다. 안방에서 법회를 하듯 다 한 식구다. 누군가 내 옆에 새로 들어와 절을 한다. 그 이마의 땀이 문틈 새어들어온 햇살에 반짝인다. 스님이 한 라인 앞이지만 굳이 줄 세울 필요는 없다. 다 한 무더기 중생이다. 스님은 툭툭 치고 나가며 거리낌 없이 예불로 이끈다. 스님과 관계 없이 나는 나대로 법당의 기운을 줍는다. 이거 따로 노는 기운이다. 그러나 다양한 소망과 꾸준한 마음들이 서로 불편없이 공중에서 만나 화기和氣로 가득하다. 꾸준하고 보편적이며 하나의 전체인 기개氣槪가 서려있다. 임꺽정이 자꾸 떠 오른다. 병해대사가 아른거린다. 지금 저 스님은 병해대사를 알까. 소설 속의 병해가 이곳에서 생불이 되었다. 


임꺽정에게 칠장사는 정신적 의지처다.

임꺽정(38세), 이봉학(38세), 박유복(37세), 배돌석(37세), 황천왕동(34세), 곽오주(27세), 길막봉(21세) 이렇게 칠형제에게 칠장사는 신비로운 정신적 의지처이다. 현실에 굳게 디딘 임꺽정은 귀신도 신도, 권력도, 사랑도 믿지 않는다. 그저 현실에 처한 처지에 모든 것을 시작한다. 그런 그에게 칠장사는 유일하게 믿는 성스로운 장소인 것이다. 이 나이들,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저 나이에 뭐를 했나. 여주에서 힘들게 청년을 마감하고 있었다. 저 나이 고비를 넘기느라 힘들었다. 온몸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많은 고비와 함께 환골탈태를 하였던 시절이다. 임꺽정 칠형제가 칠장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병해대사는 돌아가셨고, 이들은 병해대사를 추모하면서 목불을 만들어 봉안하고  그 앞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그 칠장사에서 어제 내린 흰눈에 소나무가 유난히 반짝이는 경칩의 셋째날을 맞는다. 전날 집 옥상에서 별빛을 보면서 하늘에 서린 사금파리를 떠올리며, 가깝다면 손 닿을 듯하고, 멀다면 저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여리디 여린 내 모습이 칠장사 앞에서 의젓해졌다. 


머리로는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슴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늘어난다. 머리에서 해결된 일도 가슴으로는 처리되지 않는다. 아직 뜨거워서 그런가. 가슴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가슴을 쥐어 뜯어도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 여전히 미욱한 가슴이다. 그렇다고 아무 장단에 섞이게 하지 않는다. 자존심을 기개에 둘둘 말아 숨기더라도, 머리보다는 가슴을 소중하게 여긴다. 지우고 또 지워도 진실은 남는다. 진실은 사리가 된다. 세상에 남겨질 것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진심은 그렇게 사리로 뭉칠 것임을 안다. 마음 한쪽 꾸준히 비축되어진다.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렇듯 마음 한쪽에 꾸준히 비축되어지는 진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아름다움을 붙잡고 살아야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칠장사에서 마음을 더 내려놓고 내려놓은 마음에도 정을 덜어야 한다고 기도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했다. 그래야 그게 나름대로 나를 이루는 모습이라고 여겼다.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척박한 가슴에 대한 예의고 구체적인 삶을 이루는 생동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동이라면 가장 큰 생동은 아름다움이다. 칠장사는 아름다웠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동감이 곳곳에서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