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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09. 사라지면 막막한 들판이 되어 - 성주산 성주사지

by 나무에게 2014. 2. 17.



009. 사라지면 막막한 들판이 되어 - 성주산 성주사 / 온형근



직원 결혼식으로 다녀 온 보령이다.

대학 때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리면 짝퉁 자유의 여신상이 대천 해수욕장 입구를 맞이했던 기억이 난다. 그 대천이 보령이다. 한때 성주산 무연탄광으로 충청남도 내에서 현금 동원력이 가장 셌던 곳이라 한다. 중간 여유 시간에 보령 사는 친구와 만나 중국에서 조차 유명한 남포벼루를 보자고 했다. 남포벼루에서 만난 무형문화재 김진한 옹, 성주산 중턱에서 캐내는  백운상석白雲上石으로 만든 남포벼루와의 만남,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의 벼루 세 개 중 두 개가 남포벼루라는 사실, 가슴이 벅찼다. 사람도 身言書判이라 했듯이 좋은 글씨는 좋은 벼루에서 나온다고 한다. 경건하고 바르고 정직한 마음으로 매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게 김진한 옹의 철학이다. 내게 온 벼루는 실용적이었고 동백유를 바르고 사용할 생각이었으나 집에 와서 곧바로 사용해보니 정말 기막히다. 먹 갈리는 소리가 환상적이다.


그대로 절터인 성주산문에 섰다.

성주사지는 성주산을 바라보며 지켜온 세월로 충만하다. 성주산은 통일신라시대 낭혜무염 선사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창한 유서 깊은 명산이다. 비록 해방 후 탄광으로 곳곳에 구멍이 뚫려 망신창이가 되었지만 성주사지에 들어서니 모든 것은 세월 앞에 가려지고 묻혀 주변의 풍광이 멀쩡하고 눈매가 선해진다. 폐사지에 서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가슴이 반응한다.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막막한 들판으로 남는 것일까.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지면 존재하는 것들의 기운도 흔적없어지고 막막한 들판이 되어 허공만 하염없이 되새김질 할 것이다. 허공마다 가슴이 시리다. 사방 둘러싸인 산등성이에서 따사롭고 친절한 햇살이 성주사지로 가득 쏟아진다. 그대로 절터인 성주사지는 밭이라는 질료에 잘 어울려 이제 막 솟아나는 봄풀들로 수줍었다. 야트막한 성주산의 시선을 받아 마시는 폐사지의 흙색은 풀색을 흠뻑 먹어 끝없이 풍경을 사방으로 이어가며 뻗어나가고 있다.


탑사에 두 손 모으고 깊은 울림의 기도를 했다.

성주사지의 큰 터에 국보8호인 낭혜화상탑비와 삼층석탑, 오층석탑, 석등, 금당터로 올라가는 석계, 금당터, 민불이 옹기종기 가람의 배치로 자리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없었을 폐사지에 제자리 잡아가는 이들은 또 얼마나 민망하고 수줍을까. 마치 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 서 있는 아찔한 풍경이다. 그러나 지상에 서 있는 이들야말로 바람과 햇빛과 폐사지의 숨결을 잇고  있는 것들이다. 이들이 숨겨 놓은 번잡스러운 세월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매트릭스를 지녔을까. 성주산 아래 흐르는 개울물 얕은 소리에서 잔잔해지는 마음의 소리를 더듬어 본다. 대체 이 곳 가슴 아리게 묻고 살아야 했을 소멸로의 여정은 몽환적이다. 드러난 이들 기물의 심정이 너그러워지기에는 아직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이다.  다만 성주사지의 지금은 지상으로 쏟아지는 층 이룬 햇살만으로도 넉넉하다. 땅 표면으로 가득 비추는 햇살만이 절을 이룬다. 나는 햇살에 절을 한다. 그 햇살 몇 줌을 담아 돌아온다. 당신이 사라지면 그 햇살 한 줌의 들판이 되어 민불이 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