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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59-이승희, 그리운 그대

by 나무에게 2013. 12. 23.
그리운 그대 / 이승희


내게 걸어올 때 그대 몸에선 오래된 목조 계단을 지날 때처럼 삐걱
이는 소리가 들렸다. 상처가 그대 발목에 걸려 있기 때문일까? 그런
날이면 난 그 삐걱임 속 어디쯤으로 내 몸을 뉘여야 하는지 몰라 밤
새 앓았다.
한 귀퉁이가 이미 오래 전에 떨어진 듯한 그대의 잠은 잔물살에도
자주 뒤척였고, 그렇게 조금씩 비어 있는 곳을 만지고 싶었는데 내가
잠들 때쯤이면 그대는 깊은 목관악기로 울곤 했었다.
비가 내리고 내가 그대 몸을 안았을 때도 그랬다. 나무 바닥, 오래
될수록 더 따뜻한 온기를 담아내는 그런 나무 냄새가 났었다. 그대는
언제 살아서 시퍼런 잎사귀 흔들며 펄럭였던가, 울컥이며 그대의 생
애 일부가 내 입 속으로 오래 흘러왔다. 그렇게 그대는 움직이지 않
는 아주 커다랗고 오랜 목조가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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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나무를 닮아 있다. 목성木性을 지닌 것들은 사람과 친밀하다. 사계절이 분명한 이 나라에서 계절을 가리지 않고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있다면 목질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오죽하면 목질을 닮게끔 콘크리트로 벤치를 만들던 시절도 있었을까. 사람과 가장 친밀한 자연 재료가 목질 재료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살았던 유년의 집에는 지위고하, 가세불구, 도농무관하게 마루가 있지 않았던가. 그 마루에서 기며 그 냄새에 의해 자랐다. 마루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일부로 들어가 퀘퀘하면서 건조한 먼지를 뒤집어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마루는 태어나면서부터 삐걱이고 있었다. 살면서 삐걱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움의 실체도 처음부터 삐걱이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그 삐걱임 속 어디쯤으로 내 몸을 뉘여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 그리움의 말초신경이다. 그가 깊고 그윽한 목관악기의 소리를 내든, 따뜻한 온기를 담아내는 나무 냄새를 내든 시퍼런 잎사귀 흔들 날은 단언하건대 없다. 그리운 그대, 그대는 실체가 없다. 그리움은 오래된 나무를 오랫동안 쳐다보는 노신사의 풍경이다.
2006. 11. 18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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