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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60-이선영, 헐렁한 옷

by 나무에게 2013. 12. 23.

헐렁한 옷 / 이선영



세상에 널린 여러 옷들 속에서 나는 주로 헐렁한 옷을 골라 입는다
그것은 내가 헐렁한 옷속에 나를 감춰두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는, 맘껏 드러내놓고 싶은 만큼이나 친친 감아놓고 싶은 어줍짢음이다
헐렁한 옷 속으로 내가 나를 슬쩍 밀어넣으면
나는 옷의 헐렁함 속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옷은 나를 끌어당긴 그 헐렁함의 미덕으로 나의 윤곽이 옷 밖으로 도드라지지 않게 해주었다
헐렁한 옷 속에서 그 동안 나는 속이는 일의 간편함, 세상에 나의 오목과 볼록을 드러내지 않는 일, 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많이 입어 더욱 헐렁해진 옷 속에서 지금
느껴지는 어떤 움직임, 질깃하게 짜여지지 못한
내 삶의 올이 풀리고 있다
옷을 뒤집어 본다, 내가 없다.
헐렁헐렁한 옷의 안감과 겉감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헐렁한 옷의 안감이었던 것처럼
속이고 속은 것이 나였다 안심하고 맡겨온 옷의 헐렁함이
비뚤리긴 했지만 수채화 붓자국이었던 나를 뭉개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세상과 대적하여 어거지로 입었던 그 헐렁한 옷속에서
독하게 꽃피워보지도 못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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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렁한 옷을 입는다. 입었었고 많다. 그런데 이제는 헐렁한 옷이 없다. 헐렁한 옷에 맞추어진 내 몸의 크기가 헐렁한 옷들의 거처를 철거한다. 지워진 헐렁함은 내 몸 여기 저기 각인되어 집을 짓고 있다. [옷의 헐렁함 속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지지 않는다. 여기 저기 도드라진 성깔과 때깔만 잔뜩 더께처럼 기워진다. 숨길 줄 모르고 드러내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조금만 낮추거나 숨을 멈춰 쉬기만 해도 헐렁한 옷 속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질 수 있는 것을. 나는 나를 속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독한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단 한 마디의 일상에서 눈 녹듯이 나를 풀어내리는 모습, 너무 잦다. 해서 내가 미운 적이 다반사다. 세상과 대적하지도 못하면서 날 선 헐렁함으로 도드라져 있다. 모두 벗으면 헐렁함 조차 부러워하지 않을 노릇일까. 으흠......, 오우......, 아, 예!......
2006. 11. 18.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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