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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57-이승희, 그리운 그대.3

by 나무에게 2013. 12. 23.

그리운 그대·3 / 이승희



한낮의 봄 햇살은 참혹했습니다. 그 거리에 서서 나는 주머니 속의
성냥갑을 만지작거립니다. 다시 불 켤 수 없을 것 같은 날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다시는 집짓지 않으리라 그냥 둥둥 떠서 한세상 살아가
리니, 서러운 것들은 가라고 연필심에 침발라 쓰듯 가슴에 꾹꾹 눌러
썼습니다.

그대는 낙타였는가, 왜 난 여기 사막의 한복판에 서 있는지, 그러나
내가 기꺼이 맨발로 이 사막을 받아들이고 걸어가고자 하는 것은 끝내
통속적이게 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거짓말입니다,
누가 있어 내게 다 그런 거라고 사랑도 그런 거고, 삶 또한 늘 그렇게 너
를 속이는 것 뿐이라고, 그러니 어서 적당히 쓰러지라고, 그래서 조금만
울고 일어나라고, 정말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지나는 길에 나무에 흰 페인트칠 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곧 베
어질 나무들입니다. 나는 가만히 내 종아리를 내려다 봅니다. 내 눈에 보
이지는 않지만 내게도 그런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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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 무육 용어로 간벌間伐이라는 말이 있다. 어린 나무인 치수稚樹가 자라남에 따라 산에 심겨진 나무들은 좁은 간격에 몸부림 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넓게 심는 것은 또 아니올시다다. 어린 나무에게 잡목이나 1년만에 쑥쑥 자라는 풀들은 목숨을 내 거는 행위다. 그러니 좁게 심었다가 나중에 넓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래서 간벌이 필요하다. 간벌을 할 때, 일반적으로 간벌목에게 흰색 페인트를 붓에 묻혀 한 바퀴 나무 둘레를 따라 원을 그린다. 시인의 종아리에도 그런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지 내려다 본다. [통속적이게 하고 싶지 않은]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가는 시인의 내면이 섬세하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렇고 그런 것들이 통속적이라면, 그렇고 그런 것을 보듬고 새로운 의미로 다가가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다. 베어질 나무들에게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듯이 내 그리움에게도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서 아무 때고 베거나, 남기거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당히 쓰러지고 조금만 울고 일어나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2006. 11. 18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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