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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82-최을원,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by 나무에게 2013. 12. 23.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최을원



길가 철책 너머, 오래 방치된 자전거를 안다 잡풀들 사이에서 썩어 가는 뼈대들, 접혀진 타이어엔 끊어진 길들의 지문이 찍혀 있고 체인마다 틈입해 화석처럼 굳은 피로들, 한때는 자전거였던 그 자전거

한 사내를 안다 새벽, 비좁고 자주 꺾인 골목을 돌아 돌아서 우유 한 병 조용히 놓고 가던 반백의 왜소한 사내, 수금할 때면, 고맙구먼유, 열 번도 더하던 사내, 유난히 부끄럼 많던 그 사내, 무섭게 질주하는 도시, 어느 초겨울 미명의 새벽 차도를 끝내 다 건너지 못한 그 사내

그 노래를 안다 빙판 언덕배기 나자빠진 자전거, 깨진 병 쪼가리들 만지작거리며 오랫동안 앉아 있던 그 노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고 흘러

낙엽 한 잎 강물에 떨어져 멀리도 떠내려 왔는데, 가끔씩 새벽 속에서 흥얼흥얼 노랫가락 들리고 창을 열면 낡은 짐자전거 한 대 저만치 가는, 참 오래된 그 노래를 나는 지금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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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시샘이다. 시의 샘이라는 말이다. 시인의 가슴을 가로 지르며 다가서는 것들이 있다면 마르지 않는 따스함의 눈길이다. 버려진 자전거를 바라보는 시인의 남다른 따스함을 느낀다. 금방 손이라도 잡아 준 것 같지 않은가. 추운 한 겨울, 그 따스함만으로도 거역할 수 없었던 이끌림. 때로는 어머니이고 아버지인 이 세상의 풍파 속에서 견딜 수 있게끔 마련해 놓은 눈길이 자전거와 함께 한다. 그 사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가.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고 흘러 노래가 범벅이 되어 그 사내를 지웠을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너무 낯설어진 이 시대의 자전거를 되찾게 한다. 그 따스한 시선만으로 버려진 자전거는 그 사내와 함께 영면할 수 있다. 피륙혈근골이 활발하게 타통된다. 2006.11.07..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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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호 한국주택관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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