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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87-윤석산-외로움이라는 말의 파문(波紋)을 바라보며

by 나무에게 2013. 12. 23.

외로움이라는 말의 파문(波紋)을 바라보며 / 윤석산


 

  그대여, 나는 외롭다고 말하려 하네. 내 말이 그냥 그렇게 들린다면 누군가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려 하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들린다면 누우렇게 풀잎이 시들어가는 언덕 너머로 흐르는 흰구름을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하려 하네.
  차가운 유리창에 부딪혀 가느다랗게 떠는 말의 꼬리, 그 너머 한 잎 한 잎 지는 담쟁이 이파리, 다시 그 너머 휴지쪽처럼 휘날리는 길들…
  그대여, 나는 그대라는 말의 추억을 안고 어디론가 떠나려 하네. 그러나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아네. 아직도 외로워하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사랑의 뒷끝이 얼마나 쓸쓸한지 너무 잘 알기에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네.

  오늘도 바람이 부네
  창문을 잠그고
  외롭다는 말 한 복판
  돌을 던지고
  풍덩하는 소리와
  둥글게 퍼지는 파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네.

 

(2000년 <시와 반시> 겨울호)

-윤석산 : 시집 <아세아(亞細亞)의 풀꽃>, <벽 속의 산책(散策)>, <말(言)의 오두막집에서>, <다시 말의 오두막집 남쪽 언덕에서> 등 다수
한국문학도서관 대표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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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외로워 하는 일에 매달린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한 열정이고 그 일을 이루고자는 꿈이며 그래서 매일 버리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일게다. 그래서 기어코 시인의 열정이고 꿈이며 버리고 싶은 것에서 해탈하는 경지에 이른다. '누우렇게 풀잎이 시들어가는 언덕 너머로 흐르는 흰구름'이 되어 떠나려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쓸쓸할 것이기에 더욱 외로워서 견딜 수 없다. 알고 있지만 그대로 돌아설 수 없기에 삶이라 했던가. 인연 속에서 또 다른 인연을 잉태하고 있지만, 어느 인연도 다만 인연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한다면 '창문을 잠그고 외롭다는 말 한 복판'에 '돌을 던지고' '둥글게 퍼지는 파문' 속에 침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여 외로운 나를 바라보지 마라고 말하게 된다. 그대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길을 떠나 있다. 어디쯤에서 마칠 수 있는 그런 걷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길을 내고 그 길을 향해 옳다고 생각하는 한 다시 나서는 미증유의 마침표 없는 길걷기다. 그대라는 3인칭의 추억 조차 사랑할 수 없는 걷기일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의 길걷기는......2010. 9. 5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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