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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89-도종환, 시래기

by 나무에게 2013. 12. 23.

시래기 /도종환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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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의 푸른 맛을 안다. 그 푸른 맛이 세월이고 바람이고 빗물이며 흙먼지임을 안다. 살면서 어떤 시기가 오면 시래기 맛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시래기의 푸른 날들처럼 제일 먼저 선구자처럼 푸른 맛을 낸다. 그리고는 뒤늦게 불끈거리며 다가오는 신진들의 고갱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선수는 선수를 한 눈에 알아본다. 그리고는 제 길을 향한다. 그 길이 비바람을 먼저 맞는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시 되돌아서 고갱이처럼 곱게 살 의향은 사양이다. 거친 바람 앞에 서 있는 게 마음이 시원해진다. 가끔씩 배신의 싹을 만난다. 애써 못 보았다고 속인다. 버림받아 본 적이 있어서 버림받지 않으려고 까다로워진다. 그들이 곤궁해져 옛 추억을 더듬거릴 때는 이미 까다로워져 있는 들판은 너무 황량해져 있다. 그렇지만 피하지 않는다. 알고 있다. 시래기의 푸른 맛은 고갱이의 연한 맛과 다르다는 것을. 깊이 있게 씹히는 맛을 비할 바가 없다는 것을. 시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시래기의 슬픔까지 흔쾌히 씹어낼 수 있다는 것을. <2006. 9. 28>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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