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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90-이승하, 저 강이 깊어지면

by 나무에게 2013. 12. 23.

저 강이 깊어지면 / 이승하


바람 다시 실성해버려
땅으로 내리던 눈 하늘로 치솟는다
엊그제 살얼음 덮였던 강
오늘은 더 얼었을까 얼마만큼
더 두터워졌을까
깊이 모를 저 강의 가슴앓이를
낸들 알 수 있으랴

눈 … 눈 닿는 어디까지나
눈이 흩날려 세상은 자취도 없다
길도 길 아닌 것도 없는 천지간에
인도교도 가교도 없는 막막함 속
이 반자받은 눈발을 뚫고서
누추한 마음으로 매나니로
강 저쪽 가물가물한 기슭까지
오늘 안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질기만 한 시간

저녁 끼니때는 왜 이렇게 빨리 오며
밤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인가
강은 그저 팔 벌려 온종일
받아들이고만 있다 쌓이는 눈을
눈물을, 사랑과 미움의 온갖 때를
강 저쪽 기슭에는
살 비비며 만든 식솔들
사랑과 미움으로 만나는 식솔들이 있기에
가야 하는 것이다 날 새기 전에

참 많은 죽음을 저 강은
지켜보았으리 다 받아들였으리
눈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 홀로 깊어지는 강
침묵으로 허락했던 시간이 쌓여
기나긴 저 강 이루었을 터이니
모든 삶은 모든 죽음보다
어렵다 아니,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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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강은 남한강을 위주로 기억된다. 여주에서의 생활 9년 이후에 다시 수원과 용인을 거쳐 2년을 더해 3년을 달리고 있으니 12년 가까이 남한강 근처에 있다. 과거 9년은 완벽한 남한강이었지만 지금 3년여는 떠돌이 남한강 주변이다. 강 건너를 바라보는 강변은 낭만만 있지 않다. 각종 상념과 회한이 함께 있는 곳이다. 아마 이승하 시인의 말대로 '깊이 모를' 가슴앓이를 강은 안고 있다. 거기다가 눈발이라도 역류하는 인적 드문 강가에 서면 감히 강 이쪽에서 강 저쪽이 궁금해지고 측은해지고 만다. 아마 강 이쪽이 허무하여 강 저쪽도 측은해지는게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질기만 한 시간'에 남아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하고, 그래서 묵묵히 나서야 한다. 이쪽과 저쪽이 남이 아니다. 만나서 얽히고 설켜야 한다. 부딪히고 부서져야 한다. 깊어지고 넓어져야 한다. 깨졌다가 녹여야 한다. 산산조각된 그릇 조각을 기워내 물을 마셔야 한다. 흙에서

나왔던 것들 흙으로 되돌려야 한다. 강으로부터 터져 나온 봇물같은 상념들 저 강의 깊이만큼 묻어두어야 할 일이다. 2009.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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