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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92-이규리, 예쁘기를 포기하면

by 나무에게 2013. 12. 23.

예쁘기를 포기하면 / 이규리

 

 

TV에서 본 여자 투포환 선수나 역도 선수는 예쁘지 않다
화장기없는 그 얼굴들은
예쁜 것을 뭉쳐서 멀리 던져 기록으로 바꾸었다
미모의 탤런트가 예쁘기를 포기하니 단박 연기에 물이 오르고,
예쁜 데 신경 쓰지 않는 라면집 아줌마가 끓이는 라면은 환상적이다
그런데 왜 여자는 예쁘기를 포기하지 못할까
그건 누가 가르친 게 아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상복 입은 상주가 되어서도 나는
여러 번 거울을 보았다
표시 날 듯 말 듯 입술도 그렸다
뒷 태 까지 살피다 문상객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부끄러움 아직 화끈거리지만,
모전자전, 여든 내 어머니도 아직 노인정 갈 때
입술을 몇 차례 그렸다 지웠다 한다
아무도 여자로 봐주지 않는데도 여자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놓으면 편한데 결코 놓지 못하는
그 힘도 말릴 수 없는 에너지라면 에너지다
세대를 건너오는 발그스럼한 불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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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을 좋아한다. 얼굴에 땀이 배어 있거나, 개기름이 반짝거리는 맨얼굴이 좋다. 산행을 하다 개울을 만나면 달려가 손을 씻고 얼굴을 씻어내는 사람의 생태적 사고를 존중한다. 한번 변장한 얼굴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는다. 표정이 굳어 있다. 쉽게 안면 근육을 움직일 수 없다. 일그러지는 법이 없어야 가면이 오래 달라붙는다. 그래서 그 안의 모습들이 복잡하다. '뒷 태까지 살피다 문상객과' 마주쳤을 때의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있'다.  시인은 이를 세월을 넘어서는 '발그스럼한 불씨'라고 한다. '말릴 수 없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화장기에 감춰진 그 안의 복잡성 때문에 살아갈 힘의 원천을 지니게 된다는 말이다.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남자들은 편할 것이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려는 게 또한 남자들의 '발그스럼한 불씨'인 것을 어쩌랴. (2008. 02. 29.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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