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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94-이기와, 깊음과 여유를 아는 중년의 섬진강

by 나무에게 2013. 12. 23.

깊음과 여유를 아는 중년의 섬진강 / 이기와

 

섬진강은 순수 미인이다. 상류나 하류 어디를 가도 성형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이가 들 만치 들어 깊음과 여유의 성숙미가 돋보이는 자태를 갖고 있다. 두메산골 아낙처럼 가꾸지 않았지만 촌스럽거나 무지해 보이지 않다. 정갈하게 일구어 나그네새들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모래톱을 보면 덕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모든 생명이 두루 다치지 않게 방향을 틀어 돌아나가는 것을 보면 지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한강은 그녀에 비하면 추녀다.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성형한 나머지 부작용을 앓는 여자다. 그녀의 속살에는 땟국이 은밀히 흐르고 각선미도 없는 통짜 몸이다. 철근과 콘크리트 교각을 브래지어로 착용하고 있는 여자, 그녀를 마지못해 거느리고 사는 도시의 사내들은 성적 불구에 이르거나 감퇴될 것이 뻔하다. 섬진강은 얼마나 천연한가. 아직도 제첩이 나고 희귀동물인 삵과 수달이 살고 있으며, 희귀어류인 동사리, 각시붕어, 쉬리 등을 기르고 있으니 밤마다 눈에 넣고 자도 아프지 않겠다.

이기와, '깊음과 여유를 아는 중년의 섬진강' 중에서, 시가 있는 풍경, 가교출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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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와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다.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알음이 면식이나 귀동냥이나 이메일이나 하는 인식의 끈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순수한 텍스트로 만나게 된 것도 알게 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아마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책이나 글을 통하여 알게 되었고, 그러면 나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기와 시인이 쓴 모든 책을 교보에 신청하여 읽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니 이것은 순전히 내 작위의 표현이다. 안다는 것은 사실 쌍방향이어야 하지 않을까. 실용정부가 출범한다. 대운하 건설로 숱한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다. 반대 서명을 하였고 미친 짓이라고 했다. 내가 반대하는 이유는 시인의 직관이다. 금수강산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천한 짓이다. 자연과 사람은 같은 생명을 지녔다. 오히려 자연에게 사람은 영을 깃들인 채 보살핌을 받고 있다. 과학도 기술도 자연 앞에서는 소용 없다. 자연은 가끔 생채기를 낸다. 그 생채기가 어떤 것인지 보았지 않은가.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와 사람이 건드려 놓았던 세포 곳곳을 한꺼번에 완벽하게 복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기와 시인의 산문을 읽으면서 섬진강의 순수미인론에서 참으로 기뻤다. 2005년에 나온 책이니까, 이 글을 쓴 시점은 그 이전일 것이다. 지리산의 이원규 시인을 찾아갔던, 이원규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여행 산문이다. 성형하지 않은 순수미인인 섬진강이 품어 내는 덕과 지혜, 그리고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상상되지 않는 성형의 한강, 속살에는 땟국이 흐로고 각선미도 없는 통짜 몸인 한강이 시인의 표현으로 절묘한 생명을 얻는다. '그녀를 마지못해 거느리고 사는 도시의 사내들은 성적 불구에 이르거나 감퇴될 것이 뻔하'단다.  이제 대운하 건설로 도시 사내 뿐 아니라 온나라의 사내들이 이 지경에 이를 것이다. (2008. 02. 19.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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