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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88-최명란, 멍

by 나무에게 2013. 12. 23.

멍 / 최명란

 

 

베란다에 둔 가을무가 오글오글 노란 싹을 틔우곤
물컹 썩었다
목까지 차올라 멍이 드는 무의 푸른 고통을 견디며
가슴속에 수도 없이 갈겨놓은 푸른 글씨들은 물이 되
었다
퍼렇게 오른 알몸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참 무던히도 파닥거렸을 거다
아팠던 자리에 꽃이 피고 흔적 있는 자리가 더 멋이 나
는 법
절정으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은 이렇듯 빛나는 색깔이
있다
저편으로 넘어가는 석양이 그렇고
단풍 든 낙엽이 꽃이 그렇고
삶의 끈을 놓은 이들의 낯빛이 그렇고
무의 노란 싹이 그렇다
색깔엔 늘 안간힘의 작용이 있었다는 것

 

최명란,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랜덤하우스, 2008.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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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과 안간힘, 그 관계를 배운다. 아플 때의 색깔과 행복했을 때의 색깔이 어땠을까. 파란색의 멍이 들었을 때와 붉은 홍조로 들떠 있을 때, 이들 안간힘의 질적인 차이는 무얼까. 하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오는 게 아닐까. 아팠던 자리와 흔적 있는 자리란 또 무엇인가. 아픈 것은 아물고, 흔적은 지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색깔은 남는다. 그 색깔의 종류를 알고 싶은 것이다. 색은 빛에서 발산되는 가시광선이다. 이를 프리즘을 통하여 분해하여 스펙트럼하는 것이다.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만들어 내는 빛은 가시광선이 아닐 것이다. 적외선이나 자외선 쪽의 더 안쪽으로 숨어 들어가는 전자기파일 것이다. 그러니 이를 스펙트럼하는 것은 어렵다. 고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시인만의 프리즘을 가져야 가능해진다. 시인은 가시광선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자외선과 엑스선, 감마선도 보아야 하고, 적외선과 전파까지 이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시인에게 푸른 고독과 글씨들은 그래서 물처럼 물러지기 쉬운 것인지 모른다. 2008. 04. 28.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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