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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85-임경빈, 청미래덩굴

by 나무에게 2013. 12. 23.

청미래덩굴, 나는 어릴 때 이 덩굴을 고향의 뒷산에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것이었다. 우리 동네사람들은 이것을 망개라고 불렀다. 1~2m정도로 뻗어나가는 덩굴식물이지만 둥글고 강인해 보이는 잎이 인상적이었다. 잎의 색깔은 진한 푸름이고 유달리도 번쩍였다. 광택이 있다는 말이다.

  둥근 잎으로 그들은 그간 원만한 생각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줄기와 가지는 철사줄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하다. 1억 년 이상 살아온 굳은 의지를 가지 속에, 줄기 속에 힘줄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청미래덩굴은 장하다.

  나는 따끈따끈한 가을 햇볕을 받으면서 고향의 뒷산 길을 지날 때 이 열매를 따먹었다. 약간은 새큼한 맛이 있지만 살이 적어서 항상 나는 안타까웠다. 그러나 열매의 그 둥그럼이 혀끝에서 혀밑을 지나 혓바닥에 올라오는 매끄러운 감촉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망개열매가 아직 내 입 속에서 돌고 있는 것 같다.

  청미래덩굴과 나와는 슬픈 사연이 얽혀 있다. 망개덩굴은 나에게 잔잔하게 가라앉는 착잡한 감회를 던져준다. 내가 스물 한 살 나던 해 여름 방학에 집으로 갔다.

  “너 보아라. 네 여동생이 몹시 아프다는데.”하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가서 데리고 올까. 그러면.”

  “맏며느리 노릇 하느라고 여간 아프지 않고서는 눕지도 못할 것이다. 그 애 남편도 학교에 가고 집에 있지 않으니 더욱 걱정이 된다.”

  총각 오빠를 두고 나의 동생은 먼저 시집을 갔다. 아니 시집을 보냈다.

  나는 산길을 올랐다. 데리고 와야겠기에 산길을 올랐다.

  너무나도 많은 청미래덩굴이 길을 막고 있었다. 시집갈 때 여동생은 이 길을 지났다. 여동생의 붉은 인조치마가 틀림없이 이 망개나무의 가시에 걸려서 찢어졌을 것이다. 내 여동생의 인조치마는 너무나도 값싼 것이었기 때문에 후줄근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입었던 치마를 입고 시집을 갔다.

  나는 산길을 오르면서 많은 걱정을 했다. 동생의 새 고무신이 벗겨지지나 않았을까. 잔솔밭에서 날아가는 꿩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까.

  돌아오는 산길에서 여동생은 헛땀을 마구 흘렸다. 종이보다 더 흰 얼굴빛이 한여름의 햇볕 아래 불쌍하게 보였다.

  “오빠, 이 밭이 우리 시집 거고…….”

  “넓고 좋구나.”

  “오빠, 이 산이 우리 시집 거고…….”

  “나무가 제일 좋구나.”

  “오빠, 나 혼자서 이젠 못 걷겠어.”

  어깨동무로 산길을 걸었다. 몇 번인가 고무신이 벗어지고 인조치맛자락이 청미래덩굴 가시에 걸렸다. 가시를 떼어주는 오빠의 손길은 한없이 행복하였다. 이 산을 넘으면 나의 여동생은 건강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수원으로 온 나는 기숙사에서 슬픈 전보를 받았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 캄캄한 여름밤이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슬픈 줄도 몰랐다. 책상에 앉아서 뜬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빗소리만 들으면서.

  그 다음해 여름 방학에 나는 다시 한 번 이 산길을 걸었다. 이 산길을 오빠가 걸어주어야만 저 세상에 있는 여동생이 더 행복할 것 같아서였다. 여동생이 이 산길을 넘다가 쉬었으리라고 짐작되는 넓은 산돌에 앉아보았다. 틀림없이 친정동네 쪽을 바라보고 앉았으리라고 생각되어 나도 그러한 방향으로 앉아보았다. 여동생의 앉은 방향마저 생각에 넣지 않으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장가를 갔으면 나의 여동생은 죽지 않았을 터인데 하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길가에 나 있는 청미래덩굴의 줄기를 길에서부터 하나하나 산쪽으로 밀어두었다. 여동생이 살아서 돌아올 때 두 번 다시 청미래덩굴 때문에 고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많은 청미래덩굴을, 십리도 넘는 산길의 청미래덩굴을 하나하나 길에서 치워버렸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나는 손에 박힌 가시를 혼자서 빼냈다. 빼낸 가시의 자리는 아렸지만 침을 바르고 나는 다시 청미래덩굴을 밀어젖히는 일을 계속했다.

  나의 여동생은 길고 긴 귀밑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올 때 그 귀밑머리가 신나게 바람에 나부낄 것이다. 그 치마는 매우 값싼 것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귀중한 치마로 된다. 살아오는 그런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니 그래도 청미래덩굴이 밉지 않다. 그 산길이 슬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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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빈 교수에게 조림학을 배웠다. 잘 들리지 않은 목소리, 조용하고 은근하면서 자기류의 프로페셔널한 수업, 젊은 내게는 팽팽한 자존의 시간이다. 아마 열강을 기대했을 것이다. 교실과 달리 '나무백과'는 참으로 열강이다. 내가 공부한 나무의 출발이 '나무백과'이다. 책보다 사람을 먼저 만났는데 어쩌면 책에서 다시 시작한 셈이다. 나무백과에 실린 청미래덩굴에 대한 글이다. 자기보다 먼저 시집간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아픈 시집간 동생을 데리고 오는 산길에서  헛땀을 흘리는 동생이 '종이보다 더 흰 얼굴빛이 한여름의 햇볕 아래 불쌍하게' 보였다 한다. 그런  '길고 긴 귀밑머리를' 가졌던 그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집을 가면서, 병으로 데리고 오면서 그 산길에 자욱하게 깔렸던 청미래덩굴. 그래도 밉지 않다고 한다.  저세상에 있는 동생을 생각하며 청미래덩굴 십리 산길을 밀어제치며 한 걸음씩 옮기던 작가의 실천적 감성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나야말로 [실천적 감성]으로 내 자신을 다스려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용하면서 내적인 열정으로 가득하였던 분, 그분의 모든 것을 따라가보지 않은 후인에게는 이글을 읽을 수 있는 것 조차 외람되다. (2008. 6. 23.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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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관리신문 2010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