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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2004년5월26일_여의도 공원에서

by 나무에게 2013. 12. 24.

2004년5월26일_여의도 공원에서 / 온형근



그 해, 그 아이들

2003년도인 작년이 어쩌면 특별하게 아이들을 사랑했던 해였다. 특별히 뚜렷한 어떤 성향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그 해, 그 아이들이 좋았다. 그 아이들과 다녔던 곳은 다분히 내 성향이 짙었다. 전공 관련이기도 하였지만, 다녀온 곳들은 늘 그랬다. 그 곳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그 중 하나가 이번 답사의 <여의도 공원>이기도 하다. 여의도 공원은 지금 경희대 교수를 하고 계시는 분의 공모전 작품이기도 했고, 그 이후에 당선작을 제끼고 지금 시청앞 서울광장이 그랬듯이 당선작과 관계 없이, 국내의 명망있는 분에게 위임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도 했던 공원이다.

자전거를 빌리는 데 3,000원이었다. 증명서를 맡기고 그 귀퉁이에서 다랑쉬를 만나고자 돌아다녔다. 아이들과 돌아다녔던 곳인데도 몇 번 헤멘 것은 자전거의 힘이다. 걸어다녔다면 더 정묘한 발걸음이었을텐데, 자전거는 어쩌면 더 늦게 만나게끔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 전통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은 발길을 머물게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물이 있는 경관에 머물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답사를 함께 하는 한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만날 수 있겠지만, 그 경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찰나일 수 있기에 더디게 행보하였다.

답사를 다녀 온 일상에서의 오늘은 참 답답했다. 환경과조경에서 다랑쉬 인터뷰를 온다고 하였고, 나는 나대로 준비할 학교 행사로 뻑뻑했다. 그러나 물 흐르듯 두어야 했다. 인위적으로 약속을 번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은 참으로 무지했다. 내일이 4월 초파일인지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갑자기 내일이 노는 날임을 인지하고 나서는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자꾸 느끼는 것인데 <느끼는 것>이 깊어지고 영역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렬한 행군과 집요한 맴돔이 답사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고의 과정 역시 집요해지고 끊임없이 자유롭게 맴돌 수 있어야 답사의 기쁨이 커질 수 있다. 그래야 답사 주제에 머물 수 있게 될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행준씨!
명렬씨!

그 왜 치악산 휴양림에서 다랑쉬의 결의를 할 때, 그 때 우리는 왜 이렇게 깊어지고 확장됨을 예측하지 못하였나요?

내가 만난 답사는 늘 나무 그늘처럼 안온하다. 더러 섭섭하고 다랑쉬답지 않은 모습들도 있지만, 모든 것은 새롭고, 새롭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사소통은 그렇다. 올해의 답사 주제인 <현대 조경의 현황과 해석>이라는 차원에서 두번째로 서울을 선택한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회원들의 참여도가 극을 이루었고,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흐뭇해 하였던 것이다. 가령 프랜드하우스를 예약하였다가 이태원 빌라로 다랑쉬 가족들이 옮겼을 때도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 들인 것에 대하여서도 더 달리 말할 필요가 없다. 답사를 하는 동안 발생되는 모든 상황이 이미 <답사>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대를 관통하면서 쌓은 부의 흔적은 늘 그렇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삶이었다면 늘 무언가 부지런하고 사납게 추구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거기에 국가가, 그리고 지역이 편승했을 것이다.

< 공원 단상.1>_여의도 공원에서(2004.5.23)

공원은 느끼는 것이다.
꼼짝없이 개인 자격으로 머물고 있어야 한다.
어슬렁대며 돌다가 여기다 싶으면 눌러 앉아
공원임을 잊고
거기서 자기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대부분 시간에 쫓긴다.
시간에 쫓기는 삶이 공원에 있다.
그런 반면에 공원에는 또한 시간이 증발되어 있다.
시간이 증발되어 있는 공원에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시간을 잃어 시선을 놓친 사람들에게는 내면의 풍경이 있다.
공원은 사람들에게 내면의 풍경을 그려준다.
그렇다면 공원 자체의 경관이 평가의 중심을 이룬다고 우길 수는 없다.
사람이 그곳에 있고,
잠시 하늘의 뭉게 구름이 흐른 뒤에쯤이면
그곳에 있음 조차도 까마득히 잊고
나를 잊고,
공간을 잃고,
시간이 증발되고,
나와 너가 망실되고,
존재자로서의 티끌 같은 부유만 남는다면
공원은 충분히 공원인 것이다.

그 해, 그 아이들은
나와 함께 다녔던 에버랜드의 '희원'이나 여의도의 '여의공원'이나 둔내자연휴양림의 '통나무집' 테마 여행 등이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조경적 관점으로 숨이 넘어가는 정열로, 감각을 심어주기 위하여 애썼던 그 때 그 선생님의 모습이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그 해, 그 아이들이 어쩌면 교직에서의 마지막 담임일 수 있다는 지금 생각은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한 공원에서의 추억들이 남다른 것이다. 그 아이들의 세월이 흐르면, 그들의 세계에 공원이 다가가, 그 해,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공원의 한 귀퉁이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면 공원에서의 시간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시간이 되어 오래도록 함께 할 것이다. 그해, 그 아이들의 삶 속에서...그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