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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늙은 개는?

by 나무에게 2013. 12. 23.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 도달하기 전에 멀리서 손바닥을 수평으로 이마에 대고 발뒤꿈치까지 들고 쳐다 보았다. 좀 더 가까이 하면서 다가갔으나 늙은 개는 없다. 어제보다는 20여 분 빠른 시간이다. 앉아 있던 동그란 배수로 뚜껑이 달랑 나를 쳐다 본다. 안보면 좋다. '늙은 개는 무섭지 않아.', '오히려 멍청할지 몰라.' 등 내 의견과 다른 말들에 현혹되지 않더라. 나는 무섭더라. 눈동자 조차 돌리지 않고 몸뚱아리 미동도 않는 그 자세가 무섭더라. 저보다 더 무서운 게 뭐가 있을까 말이다. 마치 스핑크스가 앉아 있는 그 모양 그대로였다니까. 무게를 느끼게 하는 데, 무게에 짓눌러 기죽고 마는데, 어찌 무섬타지 않을 수 있는가.

늙은 개를 만나면 말하고 싶었다. 내 혀가 무섬을 타 마르고 있다고. 심하게 논바닥 갈라지듯 마르고 있다고. 산길을 오르면서 겨드랑이 사이에서 옷감끼리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모자를 벗고 윗옷을 벗었다. 매우 바람이 차다. 그러나 속옷은 옷감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머리에 출렁거리며 따라 붙는 헤드라이트가 심하게 요동대며 웃는다. 온몸을 흔들면서 웃는 사람 앞에 서면 虛威的거리는 것과 같이 내 움직이는 발길도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길 때쯤이면 바람의 속도가 빨라졌다. 앞서 오르는 가방을 맨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라고, 대답도 간단하다. '아! 안녕하세요'다.

인사를 먼저 건네는 것은 내가 먼저 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유를 알고, 목적을 알고, 뜻과 의미를 새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그게 일반적이다. 속뜻을 헤아리는 것은 그만큼 감각이 있고, 지혜로운 이해력이 있어야 한다. 똑같은 현상을 가지고도 감각과 이해력을 중심으로 판단할 때, 사람마다 그 감응 속도가 다르다. 이것은 또한 관점의 차이이기도 하다. 관점이라는 것은 항상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의 추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럴때 관점은 한 개인의 사유를 살아있게 한다. 남이 먼저 추구한 관점과 감각과 이해에 '아, 맞다.' 하면서 나서는 것 또한 괜찭다. 그조차 표시하지 않는 늙은 개 같은 경우가 문제다.

늙은 개는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 가만 있는 것일까. 아님, 누가 넌지시 내게 말했듯이 멍청할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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