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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무궁 무진 환한 모심

by 나무에게 2013. 12. 24.

처음 나무를 가까이 할 때와 세월이 지나면서 나무를 가까이 할 때가 달라집디다. 아마 모든 이들이 그러하지 않을까요. 주변에서 만나기 쉽고 누구나 쉽게 알게 되는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요. 소나무류나 참나무류가 그러하고, 봄을 수놓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류 따위의 봄의 풍경들이 그러하겠지요. 그러면서 나무에 대하여 깊이 알지 못하면서도 호불호가 생기지요. 어떤 나무는 좋고 어떤 나무는 싫어지는 것이지요. 아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좋고 나쁨의 기준이겠지요.

참 많은 시간이 지났어요. 무슨 식물분류학자처럼 기를 쓰고 산야를 다니며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이 나무 저 나무 운운하며 다름과 같음을, 그리고 속사정을 나름대로 인지하고 있는 시절에 다다른 것이지요. 그 와중에 몇 번의 개안이 있었고,  몇 번의 무지를 책망하고,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어떤 나무를 바라보게 되는 일도 있었지요. 일일이 그 변화 무궁한 세월의 각도를 재고자 함은 아니지요. 적어 놓거나 기억해 두지 않았습죠. 다만 올해 유난히 나를 모시는 나무가 있었지요.

무궁화였드랬습지요.  이천에서 여주 국도를 따라 가다 보면 가로수로 심은 듯한 무궁화가 길길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여태 보지 못하다가 처음 본 듯한 풍경으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시원해지네요. 주유소를 만들고 국도 옆을 개발하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이 가로수로 심은 무궁화가 끊겨서 맛을 잃곤 합니다만, 그도 며칠 지나니까 익숙해져 참을만 하더라고요. 그러나 길을 끊고 건물을 앉히고 다시 콘크리트 화단(플랜터)을 만든 후, 그 자리에 무궁화를 심지 않고 주목이니 회양목이니 심어 놓는 것은 마땅찮더라고요.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고 있고요.

어느날은 끊긴 무궁화길에 새로 무궁화를 사다 심은 사실까지 발견할 수 있었지요. 이것은 지자체에서 자체 사업으로 책정된 예산에 의해 실시하는 것이겠지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모습이 선해집디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살짝 드러나는 이런 일들에 감동이 있습니다. 무궁화 가로수는 배달계통의 흰색보다는 홍단심계통의 꽃이 좋아 보이더군요. 적단심계, 자단심계, 청단심계로 분류되는 홍단심계통, 특히 자단심계가 예쁘고 환합디다. 그러면서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양재(사당)에서 과천길로 접어드는 곳에도 큰 나무 아래 치여 크는 무궁화들을 볼 수 있었지요.

여주-이천 국도의 무궁화에 눈이 열렸을 때, 이미 꽃들은 한 나무를 수북하게 덮고 있었지요. 그래서 눈이 열렸을지 모르고요. 과천길 무궁화는 나중에 여주길 무궁화를 자꾸 "좋구나, 좋아"하면서 흠뻑 빠졌을 때 보게 되었지요. 그만큼 한 나무에 몇 송이 간신히 피어있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알게 되었습지요. 무궁화의 꽃은 처음에 몇 송이 피었다가 나중에 활짝 다 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에 활짝 핀 무궁화라고 해서 나중에 꽃의 수가 줄고 초라해지지 않더란 말입니다. 두 달여 내내 활짝 펴 있는 것은 여주길 무궁화였고요. 두 달여 내내 몇 송이 핀 상태인 것은 과천길 무궁화였습지요. 매일 지고 피는 무궁 무진 무궁화라고 하잖아요.

하루를 살고, 그 하루를 묻고 또 하루를 맞이하는 꽃이 무궁화였습지요. 일일신우일신이었습지요. 매일 보면 그 꽃이 그대로 피어 있는 듯 하지만,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새로운 꽃을 피워내고 있었던 것입지요. 후덕한 사람의 후덕함은 닳는 게 아니지요. 후덕함은 바래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에 이르면 매일같이 맑고 훈훈한 기운을 끌어 올리는 자기 혁신이 가득할 것입니다. 아이에게 그릇이 있고, 그릇이 비워지면 그 그릇을 다시 채워 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마음이지요. 무궁화 꽃이 피어 있는 이천-여주 국도를 이 계절에 찾아보시지요. 그 무궁 무진 환한 모심의 세계를 들락거릴 수 있습니다. 장원 급제 후 행진하는 기분이 이러지 않을까 싶네요.